최인훈을 달린다 7 : 가면고

최인훈 전집 6

by 김경윤

사랑이란, 죽음의 선뜩한 냉기를 눈치 챈 자의 채난採暖 작업이랄까. 서로 몸을 오그려 붙이며 하얀 얼음판 위에서, 처음, 몸과 몸으로 비벼댄 빙하 시대의 불씨의 이름을 사랑이라 하는가. 그렇게 알아낸 불씨를, 사람들은 몸에서 몸으로 전해오는 것이지, 불씨를 하늘의 동정자가 갖다주었다는 말은 그릇 전해진 것이다. 이 사랑이란 불씨는, 사람들이 어쩌지 못할 죽음의 냉기를 막기 위하여 만들어낸, 인간 자신의 재산이다. 온대에 사는 신의 나라에 사랑이 있었을 리 없다. 삶을 을러대 추위 속에서 태어난 인간의 발명품이다. 사랑이 아무리 불타도, 눈이 닿는 곳까지 허허한 얼음 벌판의 추위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태우고 또 태웠다. 지구의 양 꼭지에만 남기고 대부분의 땅을 녹여버린 것은, 그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사람들이 태워온 사랑의 열매일까? (...) 현대는 정말 춥다. 혼자서는 불을 못 피운다. 바람을 막으며 손바닥만 한 얼음 위에 불을 피우려면 두 사람이어야 한다. 작업에는 짝패가 필요한 것이다. (234~235쪽)





1960년 7월에 발표한 중편소설 <가면고>는 11월에 발표를 시작한 <광장>보다 앞선다. 59년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니 작가의 창작정신이 가장 푸르게 드러날 시기의 작품이다. 소설이 아니라 논문이라면 '가면 또는 자아 완성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발표되었음직한 이 소설은 현실 속 주인공 민과 민의 무의식에서 발견한 또 다른 자아인 삼천여 년 전 인도북부에서 융성한 가바나국의 왕자, 다문고多聞苦의 의 이야기로 짜여있다. (다문고라는 이름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수많은 앎은 고통이다. 그 수많은 앎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영원한 앎(얼굴)에 도달하는 것은,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자, 삶과 앎이 일치하는 삶이다.) 주인공 민은 사랑의 완성을 목표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고, 다문고는 브라마(신)의 얼굴을 하기 위해 수많은 얼굴을 탐색하는 수행자이다.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파우스트적 주제를 자신의 것으로 하여 '사랑=삶의 완성'을 그려가는 이 소설의 구조 속에 주인공의 짝패로 등장하는 인물은 민의 경우에는 마라(화가)와 정임(무용수)이고, 다문고의 경우에는 궁녀 아라녀(최고의 미녀)와 다비라국의 왕녀 마가녀다. 민은 현실 속에서 마라를 사랑하면서도 무용극 <신데렐라 공주 이야기>를 위해 만난 정임에게 순수한 사랑을 느낀다. 다문고는 마술사 부다가의 조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벗겨낸 가면을 쓰면서 신에 얼굴에 도달하려고 하나 매번 실패한다. 그러다가 가장 신의 얼굴에 가까운 왕녀 마가녀를 알게 된다.


결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민의 결말. <신데렐라 공주 이야기>를 무사히 마친 민의 손에 파리로 떠난다는 마라의 이별통고가 들려있다. 자신만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인형처럼 취급했던 민은 고꾸라지듯 무너진다. 그 무너지는 몸을 정임이 가슴으로 받으며 웃는다. 다음으로 다문고의 결말. 다문고를 꾀를 내어 피리를 부는 남자로 '마음과 얼굴이 하나인' 왕녀 마가녀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얼굴을 빼앗는 데 성공하고. 다문고 왕자는 결국 자신의 계획 목표를 달성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얼굴껍질을 베껴내어 가면을 만드는 것은, 설령 그 뜻이 거룩하고 숭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끔찍한 비극이 아닌가? 이후의 이야기가 있지만 더 이상 스포는 멈추려 한다. 겁나 재밌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니.


위의 인용구는 민이 전쟁에 참전하여 눈 내리는 추운 겨울 산악행군 중, 애인을 그리며 추위를 잊는 M소위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생각한 내용이다. 사랑의 불씨로 추위를 녹이려는 군인의 모습이 애틋하다. 우리는 현대의 추위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우리는 어디에서 온기를 채집할 것인가?


사랑을 잃고 사랑을 찾는 일, 얼굴을 잃고 얼굴을 찾는 일, 마음과 몸(얼굴)이 하나가 되는 자아 완성 이야기를 소설가 최인훈은 맵씨 있게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이 <가면고>에서 그려낸 주제(가면 혹은 페르소나 문제)가 바로 요즘 나의 고민거리이기도 하기에, 더욱 몰입하여 소설을 읽게 되었다.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바처럼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까? 거기에 답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에 대답하지 않으련다. 대신 소설 속에 그려놓은 작가의 메모 중에서 내 메모로 옮겨놓은 구절이 있어 추가로 인용한다.


"현대인을 건지는 단 한 가지 길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않겠다. 네가 배를 쥐고 웃을 테니까. 무어 정말 안 웃을 테야? 그럼……

사랑하면서 열심히 살라, 이거다. 이 악마 같은 놈아. 웃지 않겠다고 하고서. 주여 그는 저의 하는 소행을 알지 못하오니……"(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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