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을 달린다 13 : 화두 1

최인훈 전집 14권

by 김경윤

도서관에서 나는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 태어나가고 있었다. 도서관은 큰 책이다. 너무 커서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한 곳에 놓아두고 있는 큰 책이다. 도서관 지붕은 책의 등이고 도서관 벽은 책의 겉장이고 도서관 문은 이 큰 책의 안 표지고, 목록은 이 책의 목차다. 이 집은 아기집[胎]이다. 이 속에서 사람은 사람이 된다. 이 집과 열람자를 닮아서 이윽고 만들게 되는 것이 우주선과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다. 우주선과 타고 있는 사람은 열람실과 그 안에서 읽고 있는 사람이다. 지구 본부는 책을 저장할 곳과 그것을 관리하는 사서(司書)들이다. 책-도서관-우주선-지구기기-아기집[胎]. 이들은 모두 같은 것들이다. (62쪽)




《화두》는 1994년, 최인훈의 나이 60세에 발표한 자전적 장편소설이다. 《태풍》 이후 20년 만에 쓴 장편소설이니 얼마나 큰 화제가 되었겠는가? 게다가 이 소설은 같은 해에 제6회 이산문학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겹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미 60세의 최인훈은 우리나라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오른 후였고,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소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기적과 같은 신간 《화두》는 출간되었다는 입소문만으로도 낙양의 지가를 높이고 있었다.

나 역시 책이 나온 해에 소문 듣고 바로 그 책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구입한 많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중도에 읽기를 포기한 – 책은 구입에서 완성이라고 고집한 - 독자 중에 한 명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단 2권으로 되어 있는 분량도 분량이려니와, 유명세만으로 읽어나가기에는 작가의 생활담이 너무도 자세히 묘사되고 있어, 지루한 - 내가 이걸 왜 읽어야 하지? - 역사책을 읽는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성급히 앙꼬만을 맛보려는 얄팍한 마음이 그 책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나는 젊은 시절의 나 자신을 용서하기로 한다. 한번 등정에 실패했다고 실패한 등산가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화두》야말로 명실상부 ‘최인훈 문학의 총체’였기에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최인훈 전집 읽기의 종착역도 바로 14, 15권 《화두》였다. 그리하여 추석 연휴의 빈 시간을 내어 다시 한번 도전! 이번에는 3일에 걸쳐서 완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독서에도 인연과 때가 있구나 생각했다. 나는 지금이 《화두》를 읽는 데 적시(適時)였던 셈.

이번에 완독하면서, 새로 느낀 점은 내가 최인훈 전집을 거의 다 읽었기에 작가의 삶에 대하여, 문학에 대하여, 문체에 대하여, 사상에 대하여 친숙해졌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화두》를 읽는데 오히려 고향집에 돌아와 옛날 앨범을 보는 듯, 최인훈 문학을 편안하게 더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인훈의 소설을 하도 오래 읽으니 이제 그가 나에게 빙의한 기분이랄까? (그러고 보니 내 나이가 최인훈이 이 소설을 발표한 나이와 동갑이구나.)


최인훈 작가가 소설 쓰기를 20년 멈췄다고 해서 그가 전혀 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희곡(새로운 시극)에 도전하여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었고, 1977년에는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취임하여 2001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초대작가로서 미국과 러시아 등에 체류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생각을 더욱 확장하고 깊이를 더해갔다. 그 지적 모색과 정리의 결과물이 《화두》라는 대작으로 나왔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이번에는 그의 소설에 국한하여 읽었으나, 다음번 기회가 되면 그의 회곡과 산문과 평론도 꼭 다뤄보고 싶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화두 1》에는 너무나 이야기할 것이 많아서 초점을 모아 인용하기로 한다. 명색이 고양시에서 ‘최인훈 도서관 설립위원회’를 맡고 있으니, 도서관과 책에 관한 부분만 꼽아보기로 한다,

처음에 인용한 부분은 어린 시절 도서관의 경험을 담은 이야기다. 그는 학교보다는 도서관을 선호하였다. 학교는 ‘자아비판’이 필요했지만, 도서관은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리고 최인훈 작가가 문학관보다 도서관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그는 책을 읽으며 생각을 다듬었다. 도서관과 책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천천히 읽어보자.


“책 속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거리에서 만나는 그 사람들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건만, 책 안의 사람들과 해바라기 씨를 씹어 뱉으며 활발하게 걸어다니는 눈앞의 사람들을 맞춰보는 상식을 나는 익히지 못했다. 책이 먼저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 생겼고 생겨서 사는 사람이 책을 쓴 것이라는 상식이 내 머리에 좀처럼 자리 잡지 못했다. 책은 사람이고, 사람은 책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잘 설명 못하겠다. 책을 종이에 쓴 책만으로 생각하니깐 어렵다.”(67쪽)

“소설의 세계는 여전히 나에게는 ‘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현실에서 왔거나 말거나 말의 힘만으로 홀연히 있게 되는 ‘그 자신으로서의 현실’이었고 그렇게 길든 독서방식은 여전히 나를 이끌었다.” (83쪽)


“도서관에서의 책 읽기를 통하여 나는 또 하나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거기서도 ‘책 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사이의 관계를 읽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것은 학교에서의 ‘과제’가 아닌 내가 좋아서 다니는 학교였다.” (90쪽)


“숙제가 아닌 그 책읽기에서 나는 ‘인류의 본질’인 ‘생물 수준의 지각(知覺)을 기호라는 인공 신경세포의 도움에 의해 초생물적 수준으로까지 증폭시키는 일’이라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글’이라는 이 기호에 의해 의식의 체력 단련이라는 체육관에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 이것은 여전히 그 정보들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아는 힘과는 무관하였지만 무엇보다 먼저 이 훈련이 있고 볼 일이었다.”(91쪽)


《화두 1》은 주로 어린 시절과 피난 후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홀로 남한에 남아 작가활동을 했던 젊은 날과 중년이 되어 미국으로 초대받아 가족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큰 스토리가 흐르고 있다. 그 와중에 그가 쓴 작품의 배경과 작가만의 해설, 당시 한국과 주변 국가들과 강대국의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다루고 있다. 미국의 있는 가족, 특히 아버지는 한국의 엄혹한 정치현실에서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니 미국으로 이민을 오는 것을 권하지만, 결국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1973년 미국으로 가서 돌아온 해가 1976년이었다. 돌아올 때 그의 손에는 순우리말로 개작된 <광장>과 희곡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들려있었다. (이후 2권에서 계속)


<사족>

처음 배경화면으로 나오는 도서관은 최인훈 작가가 2000년에 화정동으로 이사하여 자주 이용했던 화정도서관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최인훈을 달린다 12 : 총독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