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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Oct 10. 2020

운전을 정말 못합니다.

어딘가 어설픈 사내의 현실 자각 타임

저는 야무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더 했습니다. '쟤는 참 야물어'라는 말이 얼마나 듣고 싶었나 모릅니다. 사람이나 일을 대할 때 빈틈없고 깔끔하게 마무리짓는 사람들. 제게 '워너비'였습니다.


학창시절, 반장을 맡은 아이들은 저에게 이상향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들어오면 타이밍에 맞춰 '야무지게' 아이들을 인사시킵니다. 공지사항이 있으면 부끄럼없이 아이들 앞으로 나가 할 말을 합니다. 자율학습 시간에 아이들이 떠들면 '야야야, 조용히 좀 하자!'라고 외칩니다. 종이 나눠줄 때는 더 멋집니다. 우선 종이 뭉치를 바닥에 놓습니다. 엄지와 검지를 모아 종이 위에 대고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긁어줍니다. 그러면 서서히 수십 장의 종이가 층마다 다르게 회전합니다. 그러면 한 장씩 편하게 집어서 나눠줄 수 있죠.


학창시절이 지나고 이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제게 '야무진 사람'은 운전 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브레이크나 악셀을 밟을 때 '덜컹'하는 움직임이 없고 매우 부드럽습니다. 1차선에 있는데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야 할 때 적절하게 차선 변경을 잘 합니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길을 잘못 접어들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유턴을 하거나 다른 길을 잘 찾더군요.


저는 운전을 잘 못 합니다. 내비게이션이 말해도 잘 못 알아듣습니다. 일전에 강동구에서 구로구까지 갈 일이 있었습니다. 와이프와 후배를 태우고 제가 운전하였습니다. 상견례보다 더 떨리는 자리였어요. 네비게이션이 'ooo m 앞에서 좌회전입니다.'라고 알려주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더군요. 제 때 못 빠져나가고, 다음 기회에도 못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일행은 마장동을 지나 경희대 근처를 돌아 한강 이북을 횡으로 관통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한강을 건너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구로에 도착하긴 했습니다. 예상 시간을 배로 넘겼습니다. 후배는 저에게 '덕분에 추억 여행 했네요'라며 웃어재꼈습니다.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 졸음이 밀려옵니다. 정신력이 강하면 졸음이 안 온다고 누가 그러대요. 정신력이 나약한 건지, 몸에 하자가 있는 건지. 어느 쪽으로 핑계를 대 봐도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저는 1시간이 한계입니다. 대중 교통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명절 때 일입니다. 남도 천릿길을 달려야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운전대를 잡습니다. 아내는 야무져서 운전을 참 잘 합니다. 제가 운전하겠다고 하니 이따가 피곤할 때 바꿔주라고 합니다.


'아, 안 되는데. 지금 그나마 체력이 생생할 때 내가 운전해야 하는데."


2시간 이후 들른 휴게소에서 자리를 바꿨습니다. 식곤증이 올까봐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50분 정도 지났을까, 저는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염치없지만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잠깐 간이휴게소 좀 들렀다 가도 될까요?"

"······." 


말을 못 잇던 아내는 다음 휴게소에서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은 찌그러졌습니다. '나는 잘 하는 게 뭘까?' 그렇게 저는 병아리 눈물만큼 운전하고, 나머지는 다 아내가 마무리했습니다.


며칠 후, 아내가 아는 분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랑 꼭 닮은 아저씨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 졸음이 쏟아진다는 것까지도요. 그 분은 서울에서 강원도 갈 일이 있으면 꼭 아내를 대동한다고 합니다. 본인이 잠에 빠져들면 아내에게 운전을 부탁하기 위해서요. 


나 같은 사람이 있구나.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가 다시 부끄러워졌습니다. 어쩐지 내가 미워집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내가 가엾어집니다. 다시 내가 미워집니다. 다시 생각하니 내가 그리워집니다. 어딘가 어설픈 사내가 오늘도 이렇게 글을 씁니다.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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