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소녀는 한 가지 징크스가 있다.
무엇이든 고를 때, 꼭 더 나쁜 쪽을 고른다는 것.
오늘도 그랬다.
감자를 담을 자루를 고르고 나갔는데,
일이 끝날 무렵 자루 바닥이 헤져 감자들이 몽땅 쏟아져 버렸다.
찢어진 자루를 껴안고 간신히 집까지 돌아온 소녀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야옹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너무 힘든 하루였어, 야옹아.
진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그 많은 자루 중에 왜 하필 그런 걸 고른 거야.
난 운이 참 없어.”
야옹은 조용히 듣다가 말했다.
“자루를 고를 때 잘 확인했어야지.
눈으로만 보면 안 되고, 손으로도 만져봐야 해.”
소녀는 벌떡 일어났다.
“야옹아, 넌 정말 입이 문제야.
나라고 그걸 모르겠니?”
야옹은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하는 습관을 가지면 좋겠어.
넌 원래 조금 덤벙대는 편이잖아.”
소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정말 사람 속을 그렇게 긁는 재주도 재주야!
나도 덤벙대는 거 알아! 근데 굳이 꼭 그렇게 말해야 돼?”
소녀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야옹이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
소녀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녀는 어두워진 길을 오래도록 터벅터벅 걸었다.
울고 싶진 않았지만 눈물은 계속 났다.
“난 정말 바보야...”
한참을 울고 나니 좀 진정이 됬다.
생각해보면 야옹의 말이 틀린건 없었다.
하지만 너무 괘씸했다.
"짜증나..."
그때 어디선가 조심스레 들려오는 발소리.
뒤를 돌아보니, 어둠속에서 야옹이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눈은 말없이 소녀를 바라보고, 꼬리는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주변에 작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야옹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보았다.
소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야옹이에겐 이 밤길이 무섭고 낯선 길이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화난 마음은 어느새 눈녹 듯이 사라져 버렸다.
소녀는 달려가 야옹을 꼭 안고
옆에 있던 벤치에 조심스레 앉았다.
"야옹아... 미안해."
소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
야옹이 나직이 물었다.
"응 이제 괜찮아.
멀리까지 따라 오느라 힘들었지?
그러게 왜 따라왔어..."
야옹은 장난스럽게 꼬리를 휘저으며 말했다.
"네가 꼼짝도 못할 것 같다고 하길래
금세 지쳐 돌아올 줄 알았지.
이렇게 힘이 넘칠 줄은 몰랐는 걸?"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소녀는 야옹이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더 이상 화난 눈빛이 아니었다.
야옹은 소녀의 무릎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웠다.
소녀는 야옹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덤벙대는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가봐."
야옹이 뜬금없이 말했다.
"무슨말이야?"
"찢어진 자루를 가져간 덕분에 말싸움도 하고
화난 덕분에 없던 힘도 나고,
투닥거린 끝에 이렇게 같이 껴안고 있잖아."
소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덤벙대야겠네?"
야옹은 꼬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덤벙대는 덕분에 더 재미난 일이 많잖아."
둘은 키득키득 웃으며 벤치에 꼭 붙어 앉았다.
어둠은 여전히 짙었지만,
소녀의 마음속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