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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Oct 21. 2021

<뮤지엄 산>인 듯, 산이 뮤지엄인 듯

여자 둘이 다녀왔습니다.

 난 오늘 또 설렌다. 아침에 딸을 학교에 보내고 라디오를 들으며 청소를 했다. 집 앞 에그드랍에서 샌드위치 두 개를 샀다. 냉장고에서 커피와 귤도 챙겼다. 차에 기름을 든든하게 넣고 친구가 지하철 9호선을 타고 마지막 역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역 앞으로 갔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했던 내 베프다. 그 친구는 서울 서쪽 끝에, 나는 서울의 동쪽 끝에 슬그머니 붙어 있는 경기도 산다. 친구가 서울을 가로질러 중앙보훈병원역까지 와줬다. 오늘 우리는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에 간다!


  마음 같아서는 <뮤지엄 산>말고 지리산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육아에 메인 몸이다. 만나자마자 일단 돌아가야 하는 시간부터 계산한다. 친구가 집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은 늦어도 5시다. 그러면 거꾸로 계산해서 중앙보훈병원 역에는 4시에 도착하면 된다. 뮤지엄 산에서 역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니 관람을 마치고 2시 30분에 출발하면 되겠다. <뮤지엄 산>에 도착한 시간이 12시가 넘었으니 관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진 않았다. 한때는 밤새 유흥을 즐기던 우리였는데... 옛날 생각하면 뭐하나 이젠 어쩔 수 없다.   




  


  <뮤지엄 산>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파주석 벽면을 따라 빙글 돌아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예술은 1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작품 안으로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주차장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건물은 웰컴센터다. 그 안에 아트샵&카페가 있다. 기념품을 꼼꼼하게 구경하고 싶지만,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라 그곳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다음에, 다음에"를 외치며 아트샵을 나서면 눈앞에 딱 파주석 벽이 나타난다. 왜 벽이지? 꽁꽁 숨겨놓고 조금씩 보여주겠다는 심보 같다. 아니면 저기 멀리 뮤지엄 말고 지금은 니 앞의 풍경에 집중하라는 뜻인가. 벽을 따라 걷다 왼쪽에 있는 틈인 듯 문인 듯한 공간으로 몸을 돌려 한 걸음 나서면 넓은 초원 같은 플라워 가든이 나타난다. 그리고 멀리 산까지. 아직 눈앞에 뮤지엄 본관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걸어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앞에 있는 플라워 가든과 가을 하늘,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음악과 자작나무 길이 그냥 좋다. 이 뮤지엄은 담 넘어 저 멀리 있는 산까지 다 자기 땅인 것처럼 풍경을 막 갖다 쓴다. 담장 넘어 겹겹이 산까지 모두 뮤지엄으로 기억된다. 풍경을 보며 더 걸어도 좋겠다 싶다.


  여름이 지나버려 이젠 플라워가 없는 플라워 가든 끝에는 또다시 파주석 벽이다. 이 벽은 왜 자꾸 나오는 걸까. 바로 갈 수 없고 한번 꺾어 돌아가게 하고, 뒤에 있는 풍경을 바로 보여주지도 않고 숨겨 놓는다. 일본 건축물의 특징이라고 한다.


일본 같은 섬나라에서는 공간이 부족하고 시간은 오히려 남는다. 이런 경우에는 공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쪽으로 건축이 발전해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같은 면적의 공간이라도 이동 시간을 늘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면 많은 기억이 남게 되고, 따라서 공간이 더 넓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일본 전통 정원의 경우, 좁은 공간을 넓게 인식되게 하려고 분절되고, 회전하고, 돌아가는 식의 장치를 만들어서 시간을 지연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같은 공간이라도 실제보다 더 넓게 인식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유현준의 《공간이 만든 공간 》중에서


  파주석 벽이 막고 있어서 목적지까지는 한 번 더 돌아가야 하고, 조금 더 걸어야 한다. 돌아가는 길 옆의 하늘과 나무가 반사되는 수水공간에도 집중하며 걷는다. 벽은 나의 시간을 지연시키며 그 공간의 기억은 확장시킨다. 뮤지엄과 뮤지엄으로 가는 길을 함께 기억하게 한다. 파주석 벽이 끝나는 곳이 "와~!"의 스팟이다. 왼쪽으로 파주석 벽을 끼고 걷다 벽 끝에서 몸을 왼쪽으로 돌리면 드디어 워터 가든, Archway와 뮤지엄 본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와~!" 하는 감탄이 나온다. 워터 가든에 반사되는 파란 하늘과 구름, 새빨간 Archway와 뮤지엄 건물을 그냥 눈에만 담아두고 갈 수 없다. 아름다운 작품에 폐가 되겠지만 우리도 얼굴을 디밀어 셀카를 찍는다. 나중에 더해질 보정 어플의 힘을 믿는다.


  선택과 집중. 육아를 위해 어쩔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명상관에만 집중한다. 본관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을 슬쩍 보고, 1시 5분 명상관 예약 시간을 기다리며 스톤가든을 한 바퀴 돌았다. 돌무더기 사이를 고불고불 한 바퀴 돌며 경주 고분과 소꿉놀이하며 쌓아놓았던 모래더미를 떠올린다. '경주' 하니 이런 날씨에 친구와 둘이 경주 불국사, 석굴암도 한번 가고 싶지만 애는 어떡하고? 그건 안될일이다. 조금 더 키우고 우리 50살만 되면 가자.


  명상관은 스톤가든과 조화를 이루는 낮은  형태의  언덕이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뜨끈한 바닥에 원형으로 매트가 깔려 있다. 편안한 음악이 른다. 페퍼민트 오일을 손바닥에 떨어뜨리고, 손을  비벼 향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손바닥에 남은 오일을  뒤쪽과 뒷목에 바른다. 이제 누워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 , 다리, 손과 , 엉덩이, 어깨와 얼굴까지 차근차근 호흡을 보내고 이완한다. 아까  뒤쪽과 뒷목에 바른 페퍼민트의 싸한 감각이 느껴진다. 호흡에 계속 집중한다. 분명히  잠들지 않았는데 갑자기 '크릉'   고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소리가 크지 않아 다행이다. 요가를   마지막에 사바사나(누워서 온몸을 이완시키는 요가 동작) 자세에서 명상을 한다. 평소와는 다른, 격렬한 요가 동작 없는 명상이라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도 들었다.  


  명상관 돔 지붕 가운데는 얇고 긴 창이 있다. 그 창을 가운데 두고 돔이 양쪽 두 개로 쪼개져 있는 형태다. 조명이 없는 공간이지만 얇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은은하게 실내에 머문다. 오늘은 보지 못했지만 빛이 곧게 들어와 실내를 분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지붕 사이의 빈 공간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만든 선을 보고 싶다. 작은 빈 공간을 만들어 창을 내고, 그 안으로 빛을 끌어들이고, 그 빛으로 또 다른 선을 만들어내는 건축이 신비롭다. 공간은 비어 있었지만 풍경은 돔 바깥의 나무와 하늘로 꽉 차있었다. 비어 있음과 차 있음이 공존했다.

  

  명상이 끝나고 종이 박물관을 슬쩍 들렸다. 안도 다다오의 의도, 그 이상으로 우리는 종이 박물관을 찾아 빙글빙글 돌면서 작은 공간을 몇 배 큰 공간으로 체험했다. "야, 정신 똑바로 차려봐봐" 아까 왔던 길이다. 뭐에 홀렸는지 종이 박물관 화살표대로 따라갔는데 자꾸만 카페테라스가 나온다. 종이 박물관은 뮤지엄 본관 입구를 지나 카페테라스 건너편에 있었다. 본관 입구에 들어왔을 때 오른쪽으로는 카페테라스가, 왼쪽으로는 종이 박물관이 있는 구조다. 우리는 오른쪽에서만 빙빙 돌아다녔다.


  종이 박물관 2층에서 카페테라스 야외를 내려다보는 풍경이 참 좋다. 계단식 워터 가든이 보이고, 담장 너머 있던 그 산들도 다시 불려 나온다. 역시 <뮤지엄 산>은 담장 너머 산들을 또 자기들 것처럼 막 갖다 쓴다. 산이 그냥 뮤지엄이다.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종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작품도 좋지만 액자 같은 네모난 창 밖으로 보이는 산도 참 좋다.  


     




  2시 10분이 넘어서 주차장에 부랴부랴 도착했다. 허기지다. 명상할 때 우리 둘 배가 자꾸 쪼르륵거렸다. 애그드랍 샌드위치는 야외에서 먹으려고 가져갔는데, 외부 음식은 반입 금지라 뮤지엄 본관 입구에 맡겨두었다. 창문을 조금 열고 차 안에서 허겁지겁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었다. 맛있다. 궁상맞아 보이지만 그런 시간도 우리에겐 귀하고 행복하다. 곧 엄마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되는 두 사람이다.


  돌아오는 길에 또 다음 여행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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