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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Oct 28. 2021

예민한 아이를 키웠습니다(2)

  ‘그 학교 교사 중에는 자기 아이가 아침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 한 문장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지.

      

  난 좁은 평지를 걷고 있다. 길 밖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양쪽은 낭떠러지다. 그래도 내가 걷고 있는 길은 평지가 맞다. 앞만 보고 걸어가면 괜찮았다. 그곳을 아슬아슬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손을 뻗어 나를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확 잡아끌었다.           






  전에 근무했던 학교는 생태환경교육을 학교 특색사업으로 운영했고, 일 년 동안 학생들이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5월이 되면 학교의 자투리 공간에(작은 학교였지만 신기하게 자투리 공간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곳이 어딘가에 있다.) 타원형 빨간 플라스틱 고무 대야를 놓고 모내기를 한다. 학생들이 직접 흙 속에 모를 쑥쑥 심는다. 그 후부터는 1인 1역을 정해 우리 반 대야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채워준다. 틈틈이 학생들과 시간을 내어 관찰하고 사랑과 관심을 준다. 어쩌다 우리 학급 대야에 물이 마르는 날엔 어디선가 "4학년 3반 뭐 하는 거야?!" 하는 날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 그러면 벼는 저절로(?) 쑥 자라나 익는다. 도시의 학생과 교사들이 하기 힘든 귀한 체험이다.

      

  9~10월이 되면 벼를 수확하고, 탈곡, 타작, 새끼꼬기, 떡메치기 등 신나고 신기한 체험을 줄줄이 할 수 있다. 이 수확과 관련된 활동은 ‘찾아오는 농촌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에서 농부 선생님이 찾아와 진행해주신다. 우리 아이들과 나에게는 꾸준히 살피고 길러온 벼를 수확하고, 탈곡해보는 활동이 한 번 지나가는 이벤트 같은 체험이 아니다. 땡볕 아래서 물 주고, 옆 반 대야에 물이 마르지는 않았는지도 다정하게 살펴봐 주고, 오늘은 또 얼마나 자랐나 관심 가져주며 5~6개월을 보낸다. 모내기할 때는 여리여리 야들야들했던 꼬마 벼였지만, 수확할 때 손에 움켜쥐면 단단한 생명의 힘이 느껴진다.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이다.  

    

  농촌체험을 하는 날은 학교 전체가 잔치 분위기다. 그런 날에 교사는 혹시 모른 안전사고에 더 긴장을 해야 하지만 나도 덩달아 신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코너별로 다양한 체험이 기다리고 있어서 다른 반 진행 상황을 봐가며 융통성 있게 그때그때 빈 곳을 찾아간다. 탈곡 체험을 위해 탈곡기 앞에서 우리 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반 체험이 끝나고 농부 선생님께서 우리 반 학생들에게 “오늘 아침에 밥 먹고 온 친구 손들어볼까요?”라고 물었다. 절반 이상이 손을 들었다. 아침밥이 중요하고, 우리 어린이들은 꼭 아침밥을 먹고 등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선생님 아이는 아침밥을 먹고 갔나요?”라는 질문을 하셨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머뭇거리다 “...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불편했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나는 학교와 가까운 동네에 살다 멀리 경기도로 이사했다. 그즈음 딸아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고, 날 힘들게 했던 잠투정도 거의 사라졌고, 그래서 나도 살아졌다. 장거리 출퇴근이 힘들긴 해도 아이가 잠투정을 하지 않고 잠을 자게 되면서 육아 스트레스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출근을 위해 난 7시 10분에 집에서 출발한다. 유치원에 가야 하는 딸아이는 집에서 30분 거리에 사시는 시아버님께서 챙겨주셨다. 아침마다 내가 출근하기 전에 우리 집으로 와주셨다. 친정엄마가 가까이 계시면 더 좋겠지만, 누구든 기댈 언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육아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아버님께서 매일 오시니 아침 출근 전에 집을 대충 정리해두어야 한다. 개지 않은 빨래나 어제 먹은 그릇 설거지를 그냥 두고 나갈 수는 없다. 최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겨두든지, 정리하든지. 중간 정도의 청결은 항상 유지해야 한다. 난 아침에 빵이나 과일을 간단히 먹고 출근하지만, 딸아이가 먹을 밥과 반찬은 미리 준비해 둔다.

     

  딸아이가 자고 있을 때 살금살금 출근할 때도 있고, 아이가 일찍 일어나면 머리를 묶어주고 출근할 때도 있었다. 아버님은 손녀딸의 아침밥을 챙겨주시고, 유치원에 데려다주신 후 다시 댁으로 돌아가셨다. 아이의 컨디션에 따라 아침밥을 잘 먹는 날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난 딸아이가 오늘 컨디션은 어땠는지, 아침밥을 먹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날이 많았다. 일하는 엄마에게서 태어났으니 그렇지 않은 엄마보다 여러 면에서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것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가끔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지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퇴근을 하고 부랴부랴 유치원으로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을 따라 1시간은 놀아야 한다. 놀이터에서 놀고 집으로 들어오면 6~7시가 된다. 씻고, 저녁을 먹는다. 책도 읽어주고, 놀아주고, 재워준다. 아이를 재우며 나도 함께 잠든다. 난 개콘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9시 50분까지 못 기다리고 그냥 잠들어 버리는, 일찍 자는 새나라의 어른이다. 출퇴근하는 차 안을 빼면 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은 없지만 모든 것은 아이의 잠투정이 없으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지를 걷고 있었다. 평온하게.   





  

  농부 선생님이 우리 학교 농촌체험을 끝내고 블로그에 올린 체험교육 후기 글이 문제가 되었다. 교직 이수를 받아 교원자격증이 있으시다는 그분 눈에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왜 안 좋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선생님들도 반 아이들과 함께 벼를 심고, 키우고 수확했기 때문에 행사에 애착이 있었다. 체험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고, 학생 한 명, 한 명 사진도 열심히 찍어주셨다는 걸 난 알고 있다. 농부 선생님의 교육 후기에 우리 학교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동료 선생님과 함께 그 글을 찾아 읽었다. 교사들이 열심히 하지 않으며 행사에 대해 잘 모른다는 그런 글 안에 내가 있었다. ‘그 학교 교사 중에는 자기 아이가 아침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뉘앙스의 문장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는 나를 거대한 무언가로 내리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대답했으니 그분이 쓰신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별안간 그 글 안에서 난 아이에게 관심 없는 불량한 엄마, 부끄러운 교사가 되어 있었다. 농부 선생님께 했던 “...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은 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 아래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숨겨진 마음이 많았다. 아이가 아침밥을 먹었는지 모를 수밖에 없는 엄마의 마음을 다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바닥으로 확 내려앉은 마음을 수습하기 쉽지 않았다.


  내가 걷고 있던 평지 주변은 낭떠러지였다. 말 한마디에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는 건, 모른 척하고 있지만 난 힘들게 육아와 일을 견뎌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잠투정이 심할 때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선배 선생님들의 위로의 말을 믿는 척했다. 밤새 아이와 치른 전쟁은 잊고 학교에서는 얼굴을 바꿔 멀쩡한 선생님이 되어야 했다. 잠투정이 없어지고 나서는 이제 다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막히는 도로, 부족한 체력, 집안일 그런 건 다 별거 아니어야 했다. 그 정도는 남들도 다 하는 거니 나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흔들릴 걸 뭘 그리 별것 아닌 척, 다 할 수 있는 척, 괜찮은 척했나 싶다. 마땅히 괜찮아야 하는 건 없으니, 괜찮은 척은 그만해야 한다. 남들 다 하는 거 난 못할 수 있고, 참고 참으면 언젠가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훅 뒤집어지니 괜찮은 척 안 하고 그냥 있어야 한다. 그러다 가끔 폭발도 하고 뒤집어지고 적당히 지랄발광도 해야 한다.


  이쯤 되면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확장판 《육아와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삼사십 대 일하는 엄마들의 직장과 가정생활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실감 나게 담은 작품이 곧 출간됩니다. 뚜둥! 책에는 어떻게든 삶의 기쁜 장면을 만들어 써야 할 텐데... 자꾸 힘든 장면만 떠오르니 난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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