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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May 26. 2022

단짠단짠 소설인지 추억인지

 

  요즘 침이 잘 나오지 않는다. 밥도, 빵도, 과자도 입안에서 떡이 된다. 뻑뻑하게 잇몸에 들러붙는다. 물이나 국을 같이 먹지 않으면 음식을 목으로 넘기기 어렵다. 나와야 할 침이 제때 나오지 못해 음식을 먹는 동안은 턱밑 침샘이 땡땡 붓는다. 갑상선 수술 후 받은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동위원소 치료를 받은 지 1년이 넘었는데 후유증이 뒤늦게 찾아오기도 하나보다. 의사 선생님은 기다리면 낫는다고 간단하게 말씀하신다.


"얼마쯤 기다리면 될까요?"    


묻는 나에게


"일 년 정도?"


복잡하게 말씀하셨을 수 있지만 간단하게 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을 많이 마시면서 시간이 지나가길 참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니 간단한가?


  물을 열심히 먹고 있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고 밍밍하다. 전문용어로다가 의욕상실, 무기력.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에 이끌려 《가슴 뛰는 소설》을 집었다. 소설가 9명이 쓴 사랑 이야기다. 요즘 내 가슴이 뛰고는 있는 걸까? 사랑만큼 가슴을 부지런히 뛰게 하는 게 없으니 소설을 읽으면 내 기분도 좀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책장을 넘겼다.




첫 번째 이야기: 최진영의 <첫사랑>


주인공은 16살 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교복 입은 남자애 서너 명이 걸어가며 소리쳤다.


"이 새끼가 씨발 좆나 사랑한단다!"


"좆나 보고 싶었대!"


입에 착 달라붙는 이 지독한 사랑 고백(?)에 씩~ 미소가 지어진다. 난 어느새 16살 주인공이 되었다. 책 속 주인공은 '씨발 좆나 사랑한다'는 애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에이~난 안다. 그들 중 평소 나를 몰래 쳐다보는 남학생이 누구인지.


  남녀공학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아빠가 우편함에서 비에 젖었다 마른, 우글거리고 뻣뻣해진 편지를 들고 오셨다. 받는 사람에는 내 이름이 쓰여 있지만, 보내는 사람 이름은 없다. 남학생에게 온 편지라는 걸 아셨겠지만, 누구일까 궁금하셨겠지만, 아빠는 묻지 않으신다. 건네받은 편지를 읽은 내 머리 위에 아빠 머리 위를 맴돌았을 것과 닮은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 좌식 도대체 누구야?'



나를 좋아한다는 남학생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자기가 탁구를 좋아한다는 둥(지금 기억하는 그 친구의 특징은 그것 하나다.) 자신의 특징만 잔뜩 써 놓고 내가 누군지 알겠지? 그런다.


'응~ 아니. 모르겠다.'


기껏 편지를 썼는데 내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려고 이름도 없는 편지를 보냈지? 다른 건 몰라도 그 남학생이 자존감 하나는 끝내주는 친구인 듯하다.


  엉덩이 탐정이 활약할 시간이다.(흠흠. 범인은 교실 안에 있다. 아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닷!) 다음 날 등교 후 교실을 한 바퀴 쓱 스캔했다. 본격적으로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 한 번의 스캔만으로 범인을 찾아버렸다. 날 보는 B의 눈빛. 그 이글거리는 시선을 본다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우리 반에서 남들과 다른 과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남학생은 'B' 딱 한 명이었다. 난 부담스러운 눈길을 못 본 척 피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말았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S였다. B는 S가 될 수 없다. 파인애플 펜은 애플 펜이 될 수 없다. 펜파인애플애플펜.(아재아재 바라...아재개그 참 좋다.)



  공식적으로 B는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난 편지를 보낸 B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난 묻지 않았고 B는 답하지 않았다. B가 얼마간 신경 쓰였지만, 둘 사이엔 어떤 공식적인 액션도 없었다. 서로 알 것 같지만 모르는 척 시간만 흘렀다.






  소설 속에서 거침없는 사랑 고백을 하는 10대의 모습에 나의 소설인지 추억인지를 살짝 얹었다. 콩닥! 설탕 한 숟갈, 콩닥! 소금 한 숟갈. 이제 마음이 조금 단짠단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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