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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m Sep 14. 2022

언프렌디드 : 친구삭제

언프렌디드: 친구삭제


'보이지 않는 믿음이 진실이 되는 시대에서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현대적인 비극'


불이 꺼져있는 무대, 그 앞에 쭉 나열된 아무도 없는 관객석. 그리고 무대 위에는 축 쳐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마리오네트와 실루엣만 비친 조종자들의 손이 보인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손들이 꼭두각시를 점진적으로 흔들다가 나중에는 줄이 끊어진 상태로 혼이 나간 것처럼 산산조각 나있다. 조명이 켜지고, 꼭두각시의 처참한 말로는 무대 위에 홀로 놓여 있지만 가해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sns의 시대 역시 같은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사는 곳을 막론하고 원하는 때에 관계를 맺고 싶은 이와 자유롭게 연결될 수 있지만 정작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 관계를 핑계로 넷상에서 행해지는 공격 역시 물리적인 요소가 아닐 뿐 스크린 밖에 존재하는 실체는 꼭두각시처럼 산산조각 나버리는 그런 세상, 영화 <언프렌디드>는 실제 같이 구현된 가상세계에서 여실히 그 내막을 드러냅니다.


산산조각 나는 관계망의 악순환 고리


<언프렌디드>라는 제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말 그대로 친구 차단입니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재미요소로서 '절교'의 의미도 있지만 관계 악순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중의적인 요소를 시사합니다. 마리오네트를 촘촘히 연결한 줄처럼 우리가 맺고 있는 살아있는 실체의'노드'들 중 단 한 부분의 연결고리라도 끊어진다면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연결고리 전체가 끊어져 더 이상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sns라는 무대는 그 위에 있는 주인공을 비춰주는 사소한 한 가지라도 없으면 지장이 생기는 각가지 요소들의 상호보완적 총체입니다. 전체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흰 캔버스에 정형화된 텍스트와 특정 선호 이미지뿐인 무형의 인간관계의 장이고, 물체의 음영을 드러내도록 하는 무대 위의 조명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신뢰, 우정과 같은 양지와 불신, 원수와 같은 음지의 동시적 양면성을 드러냅니다. 특히 sns와 같이 보이지 않는 타인과 오로지 빠른 속도로 친해지고 연을 끊는 휘발성이 강한 관계는 같은 인격체로서 대하기보다는 양적 측면에서 본인의 사교적 가치성, 우월감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껍데기에 불과하기에 흥미를 잃게 되거나 우생학적 관점으로 특정 인물을 바라보며 한순간에 가십거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존재로 전락시키며 한 사람의 실체를 산산조각 내고 그 결과가 끔찍한 상황을 초래해도 그저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실체들은 파편화된 물리적 실체를 보면서 그들이 모르는 진실한 전후관계를 간과하고 그들의 편의대로 의미부여를 하여 완전히 쪼개진 불확실한 사실을 예술이라고 호칭합니다.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부터 파생되는 탈진실의 체험


<언프렌디드>라는 영화의 무대에서 꼭두각시의 파편과 같은 6명의 고등학교 동기들이 스카이프라는 온라인 화상채팅에서 그들의 사이버불링과 확대해석을 통한 헛소문으로 명예를 훼손시킨 죽은 친구가 영문도 모를 계정으로 그들의 방에 입장하여 그들이 가했던 폭력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의 응징으로 실제 무대를 관람하는 관객이 살고 있는 세계에 존재하지만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이용자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이버 공간에서 극을 펼치는 인물들이 행동, 성향의 발원 원인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그 상황에 즉각적으로 보이는 행위만을 마주하고 확대 해석하고 사후 확신 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를 범하면서 마치 순간순간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각본을 써 자극적인 순간을 만들어 특정 인물(로라 번스)의 삶을 죽음이라는 도착지로 인위적으로 변경하려는 집단 구성의 보이지 않는 폭력을 병치되는 이미지로서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와 sns, 그리고  '스카이프'라는 사이버망을 이용한 초연결 시스템이 상호적으로 일맥상통하는 이미지를 스크린 속에 동시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탈진실의 공포'를 간접적으로 언급합니다. 탈진실(Post-Truth)은 진실이라고 불리는 확고한 결과보다는 개개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어쩌면 이해하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는 주관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가변적 사실이 진실처럼 치부된다는 개념이며 결합 오류(conjunction fallacy)와 일맥상통합니다. 이 개념이 '영화'라고 불리는--특정 아이디어를 기준으로 어떤 식으로든 조작될 수 있는 가변적 사실이라고 비유될 수 있는--매체가 '관객'이라고 불리는 불특정 다수가 본명 대신 계정 이름으로 대비되고 개성 있는 글씨체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각 개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경험적 기억을 토대로 동시에 바라보는 2차원의 스크린 속에서 billie 227이라는 똑같은 글씨체를 가진 초자연적 존재가 영화관 스크린 속의 데스크톱 스크린이 보이지 않는 부정적, 긍정적 이미지를 상기할 수 있는 '영화관(스카이프)'이라는 한 장소에서 동시에 관람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독이 역이용해서 개인의 일상을 투명하게 관조, 혹은 관음을 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 단위의 소셜 미디어 유저들이 특정 인물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영화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온라인 화상채팅 프로그램을 마리오네트가 있는 주요 무대처럼 삼아 특정 인물의 파편화된 일상을 담은 동영상을 선호하는 입맛대로 확대 해석하는 일종의 날조 과정을 제삼자 입장인 관객이 실제 텅 빈 무대 뒷면에 느껴지는 오묘한 낌새와 같은 섬뜩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그 방에 참여하여 그들의 처참한 말로를 감정적, 물리적으로 체험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미러링'을 통해 가면에 숨어 책임감과 경각심이 결여된 재현의 윤리를 기반으로 한 시퀀스를, 즉 보이지 않는 사이버폭력의 원인이 되는 탈진실의 행태를 형상화하고 그 오싹함을 더욱 배가시켜 sns상에서 발생하는 사이버불링이라는 비가시적인 추상적인 개념을 뇌리에 박힐 정도로 충격적이고 신선한 방법으로 가시화시킵니다. 피해자 로라 번스가 넷상에서 당했던 왜곡된 소문으로 인한 집단 희롱 및 린치는 마치 마리오네트가 있는 무대를 다양한 해석을 가지고 바라보는 영화관에 모인 사람들이 영화의 재미를 따질 때 무대장치와 구성과 비슷한 세부적 요소들을 조목조목 일목요연하게 따지는 소수보다는 단순히 직관적이고 자극적, 말초적 재미의 관점에서 그 작품을 좋은 영화 혹은 떨어지는 영화로 치부하는 실상을 등가적으로 나열하는 일련을 여과 없이 폭로하여 그 몫을 고스란히 관객 스스로가 생각하게끔 전해줍니다.


진실보다는 믿음을 우선시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


로라 번스의 일탈 영상들을 교묘하게 짜깁기 하여 마녀사냥하고 오히려 뻔뻔하게 본인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주변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일들 중 하나라는 인식으로 자책감 없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존재는 주인공과 그녀의 친구들까지 위협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생중계로 보려 주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공포감에 휩싸입니다.


이처럼 로라 번스의 마녀사냥 시퀀스처럼 오직 텍스트, 선호하는 이미지나 동영상만을 소셜 미디어라는 장에 업로드하여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진실은 외면하고 쉽게 각인이 되는 사실관계가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것만을 신봉하게 되는 현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시각화합니다. 즉 확실한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진실을 벗어나 특정 결과물만을 보고 상관관계를 언제든지 확대 해석하는 확증편향의 산물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불필요한 죽음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더 나아가 존 로크가 주장한 'Tabula rasa'라는 인식론적 개념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의 상태'--무의 상태라고도 일컬음--에서 스스로가 상황과 실체를 만들어 '로고스(우주적 이성)보다는 그들 앞에 주어진 가시적이고 경험적인 존재들을 진실로서 인식하여 판단을 한다는 개념과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라는 실존주의적 철학에 입각한 해석으로 진실은 우리가 인지하기 전부터 자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이를 모르는 대중들은 오직 그들의 육안으로 직접 확인 가능한 것만이 실질적 진실을 압도한다는 인지론적 관점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말해질 수 있는 것'이라는 논리에서 볼 수 있듯이 역시 우리의 일상에서 실존하는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기술될 수 있어야 이의 타당성이 입증되어 '존재한다'라고 하는 결론으로 도달하는 개념처럼 '가시적 믿음' 자체가 형태가 보이지 않는 '진실'보다 더욱 중요시 여겨지는 현대 사회의 탈진실의 실태를 넷상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라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설파합니다.


손가락을 접을수록 드러나는 폭력의 실체


극 중 손병호 게임을 통해 기억들을 되뇌면서 서로의 잘잘못을 자백하여 죽음으로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러시안룰렛과 같은 상황 속에서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피해자 로라 번스의 계정은 결국 그들의 부끄러운 내면을 가리기 위해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차이가 있거나 약점이 현저히 보이는 이들을 배척하며 몰아붙여 주류의 집단에 속한다는 데에 위로를 하는 스스로를 베일 속에 가려 본인이 설치한 덫에 걸려 본인이 가했던 언어, 정신적 폭력보다 더한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또한 그 사건과 연루되지 않은 주변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모든 행동과 사건을 목격하는 관객 역시 방관자라는 것을 암시하여 주류의 발현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다른 형태의 정신적 폭력을 그들의 실제 삶 역시 거울처럼 비추어 사이버 상의 폭력으로 인한 누군가의 끔찍한 최후의 가능성을 경고합니다. 이런 행태는 진실보다는 믿음을 주입하기 위해 대중들을 선동하여 사회현상을 자의적으로 주도하는 프로파간다처럼 이미 로라 번스는 그들에게 있어 실제 목숨을 위협하는 탈진실을 기반으로 한 사이버폭력이라는 그 자체의 이미지로서 자리 잡게 되면서, 그들이 거칠 게 다루던 로라 번스라는 마리오네트는 오히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조종자가 되어 가해자들이 마리오네트가 되어버리는 주객전도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의문의 아이디 billie 227이라는 계정은 그들이 저지른 무형의 언어폭력, 무언의 압박이라는 무기를 사용한 탈진실로부터 파생되는 은비학(occult)적인 영화 장치로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의문의 그림자 손을 정형화된 형태의 텍스트로서 형상화한 장치를 통해 당사자의 그림자 손은 사라지고 폭력의 잔해물만 남은 조명 꺼진 텅 빈 무대만 남아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면서 왜곡된 믿음에 의한 사이버상에서의 폭력은 영화가 처음 보여준 피해자-가해자에게 어느 하나 남는 것이 없다는 공허하고 냉소적이면서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온전히 관객의 사고를 통해 성찰의 시간을 제공합니다.


정보의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수많은 왜곡이 폭력의 형태로 탈바꿈하여 진실을 가리고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믿음직한 사실을 진실로서 대체할 수 있는 이 시대를 대변함과 동시에 위험한 모든 것을 담은 21세기의 비극 <언프렌디드: 친구삭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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