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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m Oct 13. 2022

탄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재의 상보적 투쟁

영화 <더 랍스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보편적인 주제인 억압, 통제, 욕망 속에서 피어나는 동존성을 기반으로 개개인의 창의적인 미시적 우주와 병치되는 철저히 정해진 제도를 하나의 부동의 법으로서 여기는 압박적 요소로부터 외재화 된 권위에 짓눌린 거짓된 사랑놀이에서 진정한 작은 미시적 우주를 창조하는 사랑을 실현해내고야 마는, 그리고 그 행복의 이면에는 서로의 희생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를 기계론에 근거한 운명론적 세계관이 내포된 말초적 쾌락, 인간관계의 우위, 명예, 긍정적 평판을 향한 맹목적인 열망에 있어 동물과 인간의 불교적 윤회 사상론과 상존하는 범신론적 세계관 역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정을 지닌 연극적 디스토피아에서는 이성에게 버림받게 되면 45일 이내로 짝을 만들지 않으면 짐승으로 변해버리는 초자연적인 제도가 존재하는데,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일부러 꾸며낸, 인간적인 미가 결여된 인위적인 생활패턴과 행동양식을 마치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연극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기계처럼 흘러갑니다. 이로서 영화는 인간이라는 생물체 중 일부를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개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유전자 번식과 생리적 제한이라는 진화생물학적 관점과 생활양식의 통제와 억압, 음지에서의 욕망 분출이라는 사회문화적 제한 하에 그저 정해진대로 돌아가는 공장기계의 톱니바퀴의 일련처럼 어떠한 인간미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Tit-for-tat이라고 불리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우주적 질서에 맞게 배치된 구성품의 일부로 칙칙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그려냅니다.


이와 대조되게, 랍스터라는 생명체는 100년 넘게 장수하고 끝없이 번식하며 살아가며 푸른 피를 지닌 다른 개체와는 차별화된 생체적 특징을 지닌 유기체이기에 주인공은 희소성이 낮은 흔하디 흔한 짐승 대신 교재에 실패할 시 그에 대한 페널티로 환생할 대상을 가재로 선택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인간이 본질적으로 원하는 차별화라는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불가침의 체제 속에서 굴종적으로, 오직 생존을 위해 꾸며진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축화의 대상이 되는 동물을 윤회의 대상으로 삼지만 오직 데이빗 만이 갑각류인 가재라는 개체를 선호하며 배려, 존중, 공감과 같은 인류애적인 면모를 타인에게 발휘하고 다른 복종화된 개체들로부터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런 억압과 통제라는 시스템적 모순의 이면에는 불교의 윤회적 사상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합니다. 업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에 따라 특정 위치의 생물이나 사물로서의 생을 다 한 개체가 살아온 가치와 동등한 개체와 환생할 육체와 그 질적 성격에 따라 윤회되는 것처럼 무감정한 자연의 순리를 단독성을 지닌 주인공이 호텔 투숙객이자 윤회를 기다리는 생명체의 일원으로서 참여한 만인의 만인을 향한 경쟁상황은 <헝거게임>과 같은 심각한 상황과는 대조되는 개개인 단위로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마취총으로 처치하고 그 상황에 희열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고통을 느끼는 그 우스꽝스러운 우화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을 웅장한 클래식 음악의 비소화적 소리로 모든 경쟁 장면을 한 샷에 담아내고 와이드 렌즈의 광각 샷과 스페리컬 렌즈의 BOKEH 기법을 동원한 슬로우모션을 가미한 와이드 샷, 미디엄 클로즈 업, 클로즈 업의 연속으로 마치 한 폭의 자화상의 일련처럼 단편적인 부분들을 잘라 파노라마처럼 길게 이어 여러 작품을 한눈에 보는 듯한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저열하지만 번식과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고군분투의 화폭은 뒷 맛이 씁쓸한 웃음을 전달해줍니다. 이 시퀀스에서 선보이는 처치한 사람 수대로 인간으로서의 생이 늘어나다는 규칙은 제로섬 게임의 원칙, 즉 제도라는 통제의 성질을 시청각적 함축으로 통렬히 전달합니다. 그 뒤로 인위적인 정제를 거친 거짓된 감정 표현을 하는 개체의 등장을 넘어서 감정 표현을 배제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건물에서 투신한 여성이 고통 속에서 울부짖지만, 단지 그것을 신체가 손상되어 유기체로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개체 중 하나이기에 그저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고통의 신음소리를 뒤로 하고 냉혹함을 유지하는 사이코패스 여성은 굉장히 불협화음적이면서 시스템 복종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안락한 숙박공간과 식량이 풍족한 호텔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그 어떤 부조리함과 부정적인 의미의 초상식적인 양태를 목도하여도 그저 그런 일은 일어나고 단지 그것을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나약한 감정은 허용되지 않는 절대적인 일원론적 원리원칙을 견고하게 고수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최후를 맞고 재 성성되는 억압과 제도의 무한성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통제의 연속인 일생 속에서 그동안 감쳐왔던 억압으로 축적된 응고물인 사이코패스를 살해함으로써 분출하려는 인간적인 리액션을 보이며 동물과는 달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나 압도적인 권력과 체제라는 시스템에 어떤 방식이던지 부딪히고 변화시키려는 에너지를 함축적이고 무덤덤하게 시사하고, 제도에서 벗어나 이에 대한 욕구 분출과 바깥세상의 드넓은 초원을 연속적으로 병치하여 표현합니다. 하지만 도피한 곳에는 자유란 없다. 무조건적인 교제를 강요하는 우리(cage)와는 달리, 넓은 공간에서 기다리는 것은 해방과 자유가 아닌 그들을 감시하고 같은 개체인 사람에 의해 암살을 당하거나 눈을 멀게 하는 등의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자의적 형벌의 시스템 속에서 데이빗과 여주인공은 서로를 도와주며 상생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냥한 토끼를 선물합니다. 토끼는 안락함, 풍족함, 그리고 나약함과 상보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상징체로서 먹을 것과 당장 제거해야 하는 적을 높은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하는 마치 나체와 같은 상황에서 도움을 건네 안전함을 제공하는 상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줄타기의 끝에 맞이한 실명이라는 재앙은 행한 대로 되 갚아 돌아오는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우주관에 만연한 상보적 이치에 따라 억압을 주도적으로 행한 악역을 담당하는 모나드와 이에 동반한 시스템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악역은 일시적으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동시에 붕괴됩니다. 교제 사실을 들켜 시력을 완전히 잃은 여주인공의 눈이 되어 도피하여 온 곳에서 주인공이 반드시 그녀에게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고 똑같이 자신의 눈을 칼로 찌를지 말지를 고민하고 스크린이 블랙아웃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며 생을 마감했던 비극은 재생성되어 억압과 통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결국 모든 것을 통제하는 자연 속에서 진심을 다해 사랑을 나누는 애틋하고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며 동화되어가는 미시적 우주를 창조하는 신성한 작업의 일부라는 것을 묘사하고 이를 억제하고 방해하는 인위적인 제도와 규제의 관점에서는 본능과 이를 책임지고 살아가는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눈만 뜬 맹인이지만, 이들은 물리적 실체가 보이지 않아도 온전히 느껴지는 초자연적인 믿음과 상생하며 애틋한 협력의 동기를 부여해 물리적인 요소들로 억압하는 이들과는 철저히 다른 진실을 볼 수 있는 현저한 특징을 가진 자들이라는 메시지를 애처로운 BGM이나 감정표현 없이 오로지 정면만을 응시하는 무위한 감정만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어 극적인 장치를 철저히 배제하여 상징합니다. 표면적으로 주어진 상황 설정에 익숙한 관객들을 향해 눈에 타자화되어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 형성된 오직 제삼의 눈을 통해 눈을 찌르고 온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연출함으로써 억압과 통제처럼 속 빈 강정은 그저 진실이라는 독재와 억압이 만연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덮어놓는 흰 천막과 같은 존재일 뿐 결국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바람처럼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리를 내포한 우화와 신화적인 면모를 한 껏 뿜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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