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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m Oct 13. 2022

<더 페이버릿>

권력과 구애 그리고 몰락,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잊을 수 없는 그 맛

<더 페이버릿>은 관객이 정신없는 치정극을 끝없이 따라가는 방식을 채택하여 극의 흐름이 서서히 진행되는 것 같아도 몰입감 있게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연극적 과장이 넘치는 이 작품에 관조적 시선의 3인칭 시점, 전지적 시점을 추가하여 생동감과 개성을 더합니다. 에비게일과 사라, 앤 여왕의 권력 투쟁에 관한 관찰 카메라 형식의 페이크 다큐의 시점을 내포하는 극의 형식도 교묘하게 차용한다. 특히 일반 스탠다드 렌즈에서 기반하는 와이드샷이나 풀 샷보다는 10-50mm 사이의 광각을 가진 익스트림 와이드 앵글 구도를 연출하는 어안렌즈를 이용하여 관음적인 시선을 생성하고 그러한 투쟁이라는 한 폭의 회화를 지긋이 바라보듯, 시각적 위치는 철저한 전지적 시점을 유지합니다.

더 페이버릿은 왕이라는 가변성으로 점철된 인간계에서 부동의 절대적 자연으로 존재하는 부류가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진 채 '감정'이라는 미시적 우주의 흐름을 주도하고 통제하는 전지적인 영역으로 도달하려는 그 무게는 추하면서 동시에 그 우주 속에 살고 있는 개개인의 감정을 주재하는 내면 속 의식의 미시적 우주를 뜻하는 가변적인 자연관의 혼합적 관계를 영화 내내 페르소나와 베일을 벗은 숨겨온 콤플렉스를 상징하는 코르셋과 나체라는 표상적인 매개체들로 우화의 블랙코미디적 스토리텔링을 시도합니다.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내면에 감춘 콤플렉스의 웅덩이의 상징이자 그러한 베일이 쌓인 코르셋과 신체가 혼연일체 된 변신(metamorphosis)의 상태라는 중의적인 성질을 함축하며 코르셋은 절대적 부동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철저히 감춘 변덕성이 심한 감정이라는 생명적 페르소나와 옷이나 지위 같은 무생적 페르소나를 한데 어우르는 상징체임을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모나드인 음모와 모함, 그리고 이간질과 접대를 통해 보여줍니다. 또한 개개인 단위의 상징체를 넘어서 권위에 맞게 각자의 위치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예정 조화설에 기반한 우주관에서는 그러한 모나드들이 생활하는 왕궁이라는 장소 자체는 페르소나로 위장한 개체들의 연극과 이를 벗어던진 진실한 모습의 모나드들을 집약적으로 선보이면서 욕망과 충동으로 파생되는 가변성으로 점철된 영화가 다루는 하나의 우주로서 그 역할을 다합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8막의 단편적인 시퀀스의 연속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체'상태의 애비게일이 정점으로 올라가는 우화적 모험담처럼 묘사되고 연극과 비슷한 틀을 지닌다. 애비게일이 비좁은 마차에서 왼쪽-오른쪽에 동시에 존재하는 빈민층과 귀족층을 180도 법칙과 그라운드 레벨을 동반한 와이드 샷으로 버림받은 본인 그 자체를 처연하게 묘사합니다. 이와 대조되는 귀족들끼리의 오리 경주를 통한 도박 시퀀스는 철저히 1인칭, 그들을 아우르는 3인칭 시점으로 광열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귀족의 모습을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조금은 추한 면모를 띄는 시점 샷으로 권력투쟁의 민낯을 페이크 다큐에 등장할 법한 재연 장면처럼 인서트 컷으로서 등장시킨다. 그리고 경기 장면을 와이드 앵글로 3인칭 와이드 샷을 잡는 장면은 확고함을 상징하는 왕과 귀족적 신화의 이미지를 산산조각 내는 호라시안 풍자 법을 선보이면서 부조리함에 관객의 속을 뒤집어엎어놓습니다.

더 나아가, 사라와 애비게일의 두 번에 걸친 사격 장면의 병치를 통해서 이 작품에서 자연과 상등화되는 절대적 부동성을 향한 처절한 주객전도를 선보입니다. 그 이후로 외로움에 파묻힌 앤 여왕의 구애를 받아주는 와이드 앵글을 이용한 로우 앵글을 소실점으로 집중된 과장된 원근법을 통해 극적인 한 폭의 회화의 영상화를 일궈내며 인서트 샷으로 와이드 샷의 A-roll, 로우 앵글과 아나모픽 렌즈의 BOKEH 기법을 가미한 B-roll을 연속적으로 상조시키고, 처절한 트래킹 샷을 동반한 핸드헬드 기법으로 애비게일이 부동적 절대자를 흔드는 장면을 시각화합니다.


이러한 우화적 재연으로 점진적으로 쌓이는 애비게일의 권력 투쟁은 보금자리에서 잡일을 하려 입장할 때 우리에 갇힌 무수히 많은 토끼들이 존재하는데, 이 토끼들은 영화 <더 랍스터>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했듯이 안락함, 평온함그리고 풍족함을 포함하여 이와 동시에 아이를 잃은 트라우마로 파생된 내면의 나약함을 내포하는 상징체로서 앤 여왕을 대변합니다.

아이를 잃은 대로 토끼를 키우며 나약한 애상을 위로하고 토끼의 급박함에 파생되는 풍족함은 앤 여왕의 고립감과 독단적으로 텅 빈 상태로 남겨진 그녀를 안락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주어 감정적 균형을 일궈내는 막중한 역할을 하는데, 사라와 애비게일의 두 번에 걸친 사격 장면의 병치를 통해서 이 작품에서 자연과 상등화되는 절대적 부동성을 향한 처절한 주객전도를 앤 여왕과 귀족들은 각각 다리를 다친 채로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막 걸음마를 떼는 미성숙한 어린아이처럼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연극무대에서 생기는 fill light와 back light를 이용해 단독 우화 무대처럼 독단적으로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카메라는 와이드 샷으로 좌우로 트래킹 하는 흥분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표현함으로서 권력이라는 철옹성 같고 영원 무결해 보이는 이상이 그저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적 기질을 발휘하여 창조해낸 순간순간의 행동의 결과로 운명이 전복되고 붕괴될 수 있는 위험한 줄타기와도 같다는 것을 처연히 나타냅니다. 동시에 가변적 존재이며 불완전한 것이기에 언제든 붕괴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스꽝스럽지만 처연히 나타냅니다.


철옹성과 우유부단함과 변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런 예측 불가능한 유아적인 권력의 상아탑은 애비게일의 위엄 있는 도전자의 면모를 부각하는 하인들이 뒤에서 맹목적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롱테이크의 백 트래킹 샷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떠나는 애비게일의 뒤를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듯한 장면을 배치하는 메니피안 풍자 법으로 몰락의 복선을 제시합니다. 개별적인 프레임에 로우앵글과 하이앵글로 철저한 상승과 하강이라는 위치 관계를 수많은 토끼들의 디졸브 샷의 동치로 일원론적인 권력이라는 허상의 우주를 정복하려는 삶의 말로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 달콤한 권력이 바늘구멍이 뚫린 풍선 같은 가치를 지닌 거짓말의 부수적인 요소로 인해 처참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시연하며 자연으로 대변되는 통치자는 계급과 상관없이 영겁회귀적 성격을 공유한다는 씁쓸한 맛도 유유히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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