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었다. 한낮의 무더위는 한 풀 꺾이고 해가 지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기분 좋은 계절이었다. 새 천년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가올 2001년을 애타게 기다리던 앳된 청춘이었다. 학과 친구들 중 누군가는 취업 준비에 한창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편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내 미래를 그리며 새롭게 펼쳐질 세상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뭐든 거머쥘 수 있을 것 같던 자신만만하던 그 계절에, 나는 아팠다.
투병 생활은 생각보다 고달팠다. 우선 온몸에 털이란 털은 모조리 사라졌다. 단발이 교칙이었던 중학교 시절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짧게 잘라본 적 없던 긴 생머리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꿈 많던 나의 20대의 시작은 그렇게 안갯속에 갇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머리에 슬퍼할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극심한 오심으로 침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로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머리카락 따위에 슬퍼할 기운은 남아있지 않았다.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물 한 컵이라도 마실라치면 두 컵을 토해냈다. 멍하게 병실 천장을 보며 인체의 신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완치되기를) 기도했다.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알라신까지 뭐가 됐든 기운이 날 때마다 간절히 소환했다.
그 시절 나에겐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있었다. 비유나 상상이 아닌 진짜 분신, 아니 나의 수호신. 딸이 몹쓸 병에 걸린 그 순간부터 그녀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병실에 온갖 살림살이를 꾸려와 나의 수족이 되었다.
그녀는 깊은 밤이면 계단 참에서 몰래 숨겨온 가스버너를 켜고 미리 준비한 흰쌀밥을 정성껏 눌렸다. 다음날이면 얼마 삼키지도 못하고 게워낼 딸을 위해, 돈만 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누룽지를 몇 시간이고 눌렸다. 그 계단에서 나의 수호신은 밤이면 밤마다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밥이 눌리며 내는 타닥타닥 소리를 들으며, 코끝을 스치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살린 딸이 세월이 지나 저 닮은 딸을 낳았다. 올해 중학생이 된 아이는 불닭볶음면에 누룽지를 입가심처럼 곁들인다. 엄마의 누룽지를 먹고 살아난 딸은 자신의 딸을 위해 누룽지를 끓인다.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 누룽지를 쟁여 놓고 끓인다.) 밥이 떨어졌을 때도, 밥이 하기 싫을 때도, 매운 음식을 먹을 때도 무조건 끓인다. 그렇게 자주 끓이는데도 끓일 때마다 엄마가 생각난다. 그런 날엔 어김없이 엄마한테 전화한다. 나 지금 누룽지 먹고 있다고.
집에 누룽지를 쟁여놓고 먹는 나도 딸이 아플 때만큼은 직접 흰쌀밥을 눌린다. 엄마한테 전수받은 방법 그대로.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엄마는 얇은 스탠 냄비로 누룽지를 눌렸는데 나는 통삼중 스탠 프라이팬을 사용한다. 엄마는 그 얇은 냄비로도 누룽지를 척척 만들어냈다. 역시 고수는 장비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한때는 지나간 2년이 너무 아쉬웠다. 한 발짝 앞서가는 친구들을 보며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아보니 긴 인생에서 그 2년은 그저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사람은 모든 경험에서 배운다. 나는 삶의 소중함과 엄마의 헌신을 뼈에 새겼다.
살아가는 일은 사라지는 일이지만 나는 내 젊음을 부러워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나는 여기에 두고, 여전히 '처음'인 많은 것들에 매번 새롭게 놀라면서 다음으로 가고 싶다. - 슬픔의 방문, 장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