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70년 ‘춘추전국시대’가 막을 열었다면 바야흐로 1990년대 대한민국에는 ‘김밥전국시대’가 도래했다. 김밥천국을 필두로 김밥나라, 김밥박사 등의 김밥 전문점이 줄지어 등장했다. 상호에 김밥이 들어간다고 해서 딱히 김밥만 파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메뉴가 30가지 이상은 되었다. 단돈 1000원이면 맛있는 김밥 한 줄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고, 이삼 천 원만 추가하면 라면, 떡볶이, 비빔 만두 같은 분식부터 볶음밥, 순두부찌개, 돌솥비빔밥 같은 백반 메뉴까지 알차게 골라 먹을 수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그 시절, 김밥은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요,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김밥전국시대’가 도래하기 전, 엄마는 특별한 날이면 꼭 김밥을 말았다. 대표적으로 소풍과 운동회가 있었고 내 생일이나 오빠 생일에도 김밥을 말았다. 가끔은 주말에도 말았으니 우리 집 식탁에는 꽤 자주 김밥이 올랐다. 손이 큰 엄마는 한 번 말 때 기본 스무 줄 이상을 말았다. 아버지는 타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김밥은 고스란히 우리 세 식구의 몫이었다. 그날 다 먹지 못해도 괜찮았다. 남은 김밥은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며칠 뒤 계란 물을 입고 김밥전으로 재탄생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고백하건대 결혼 전까지, 그러니까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김밥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가 김밥을 말던 그 특별한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으로 김밥을 먹곤 했으므로 아주 물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엄마의 김밥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먹다 남은 김밥으로 만든 김밥전을 더 좋아했다.
엄마는 아파트의 좁은 베란다에서도 맛깔나게 김장 김치를 척척 담그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흔치 않았던 바질, 오레가노, 타임 같은 허브를 듬뿍 넣고 동글동글 완자를 빚어, 미트볼 토마토 스파게티 같은 이색적인 음식도 기똥차게 만들어냈다. 하지만 희한하게 김밥만은 예외였다. 그런 내가 엄마의 김밥을 군소리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건, 김밥과 함께 세트로 등장하는 엄마표 멸치 육수 장국 덕분이었다.
김밥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 취업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던 그는 삼시 세끼 김밥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네에는 단골 김밥 가게가 무려 3군데나 있었고 그날 기분에 따라 여기저기 돌아가며 김밥을 먹었다. 그런 그에게는 자기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었는데, 김밥은 김밥 본연의 맛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즈음 나는 가지각색의 재료가 들어간 캘리포니아롤에 꽂혀 있었다. 알록달록한 예쁜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고, 곁들인 디핑 소스에 따라 다른 맛을 내는 그 익숙한 듯 다른 음식이 좋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와의 첫 데이트에서 매우 냉정하게도 그 음식에 불합격을 날렸다. 나는 김밥의 사촌이라 항변했지만 그 사람은 김밥의 아류라고 말했다.
이후 그 사람과 여러 김밥 맛집을 섭렵하며 김밥의 참 맛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 김밥의 문제점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밥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자고로 김밥용 밥은 고슬고슬하게 지어야 한다. 밥이 너무 질면 두껍게 깔릴 수밖에 없다. 잘 지은 따뜻한 밥에 소금과 참기름으로 밑간을 하고 김 위에 얇게 펼친다. 계란 지단, 단무지, 햄, 맛살, 당근을 기본으로 시금치나 오이, 짭조름하게 조린 우엉 또는 어묵을 듬뿍 넣어 단단하고 야무지게 만다. 잘 말린 김밥 위에 참기름을 바르고 통깨까지 뿌려주면 근사한 김밥이 완성된다. 기본 김밥 외에도 참치를 넣은 참치 김밥, 불고기를 넣은 불고기 김밥, 청양고추를 다져 넣은 땡초 김밥 등이 있다. 김밥의 종류는 넣는 재료에 따라 무한대로 확장된다.
이론을 완벽하게 섭렵한 나도 김밥을 말다 보면 밥이 두꺼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엄마표 멸치 육수 장국이다. 진하게 우린 뜨거운 장국 한 모금이면 퍽퍽한 김밥이 단숨에 넘어간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장의 무기가 있지 않은가! 바로 계란물을 입혀 김밥전으로 새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죽은 김밥도 살리는 김밥전 만드는 법]
1. 먹다 남은 김밥을 준비한다.
2. 계란을 풀어 소금 간을 한다.
3. 김밥을 계란에 담근다.
4. 달궈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 굽는다.
5. 취향에 따라 소스(케첩, 칠리소스 등)를 곁들인다.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다른 맛을 내는 김밥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무한대로 확장하는 한계가 없는 사람이고 싶다. 혹여 실패하면 어떠하랴. 옆에 있는 장국의 도움을 받아도 되고, 김밥전처럼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도 된다. 뭐가 됐든 속이 꽉 찬 단단한 김밥이라는 본질만 변치 않으면 된다.
엄마는 자식들이 출가한 지금도 가끔 김밥을 만다. 그리고 ‘일류 김밥 감별사’ 사위를 호출한다.
“배서방, 김밥 먹고 가게나.”
우리 부부는 두꺼운 밥 보다, 더 두꺼운 사랑이 들어간 엄마의 김밥을 맛있게 먹는다.
잘 말아줘. 잘 눌러줘. 밥알이 김에 달라붙는 것처럼 너에게 붙어 있을래. 날 안아줘. 날 안아줘. 옆구리 터져 버린 저 김밥처럼 내 가슴 터지게 한 너. 널 사랑해. 널 사랑해. _ 김밥, 더 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