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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부언니 Jan 31. 2022

내가 준비되었다는 걸 언제 알죠?

작년에 썼던 편지를 열어보았다.

내가 준비되었다는 걸 언제 알죠?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도약을 망설이는 마일스 모랄레스에게 피터 파커는 이렇게 대답한다.
“알 수 없어. 그냥 믿고 뛰어내리는 거야. 그게 다야."

"You won’t. It’s leap of faith. That’s all it is.”


또 해를 넘겼다.(고 이야기하기 민망할 만큼 시간은 지나버렸지만) 2021년에는 참 많이도 화내고, 많이도 울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며, 무척이나 허우적거렸다. 나는 물 밖에서도 물속에서도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해치웠던 2021년이었으니까. 사실 그렇게 일을 해치워 나가기도 버겁긴 했다. 돌아보면 촘촘한 전략도 없었고, 이렇다 할 결과 분석도 제대로 못했던 것 같다. 지금처럼 허우적거리기 전에 썼던 편지를 열어보았다. 2020년 연말에 썼던 편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른이 되고 맞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는 어때?

나는 있잖아. 사실 올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확실한 건 올해 크리스마스이브는 정말 많이 웃으며 보낸 것 같다는 말이지. 신기하지 않니. 어떻게 이렇게도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이리도 열심일까. 그래서 더 조바심 나고 안타까운 것 같아. 아무튼 나는 평생 가장 건강한 한 해를 보냈어. 아이러니하지. 세계가 병들었는데, 나는 건강했다는 사실이 말이야.


유후인도 가고 싶고, 독일도 가고 싶고, 세부에 보라카이에 참 가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말이야. 지금은 좀 어때? 하늘길은 다시 열렸니? 여전히 너를 움직이게 하고 둥글어지게 하는 사람들의 곁에 있니? 리트니스도 이제 2살이 되었겠네. 어제 션이 상표권을 등록했다고 기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름을 얻는데 1년이 걸렸으니, 2년째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애칭으로 불러주게 된다면 참 멋질 것 같다. 사람들이 붙여준 애칭 같은 게 생겼다면, 나에게도 알려줘! 여전히 건강하고, 여전히 사랑을 배워나가길 바랄게.


2020.12.24



올해로 8년 차 디자이너인 내가 연말이 되면 의례 하는 의식이 있다. 의식을 거행(?)하는 시간이나 장소, 함께하는 사람들은 매년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매년 팀원들과 함께 편지를 썼다. 수신은 1년 뒤의 각자. 모든 편지가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힘들겠지만,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존재로부터 받게 되는 이 편지는 크던 작던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작년엔 유난히도 힘들었던 기억밖에 없다. 눈에 띄지 않는 성과에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나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높았다. 내내 다그쳤던 것 같다.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채근하고, 자꾸만 날을 세우는 스스로를 미워했다. '아무튼 평생 가장 건강한 한 해'를 보냈다는 2020년의 편지가 민망할 만큼 너덜너덜한 2021년이었다.


사실 이번 연말에는 편지를 쓰지 못했다. 벌써 2022년도 1월이 다 가고 있는데 여전히 한 줄도 적어 내려가지 못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팀원들이 모두 편지를 쓰는 자리에서 나는 편지봉투만 만지작거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자신이 미워서, 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과거에 편지를 써 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늦었지만 오늘에라도 올해 연말에 열어 볼 편지를 써둬야 하지 않을까? 지금 써두지 않으면 연말의 내가 꽤나 서운해할 것 같으니까. 비록 올해는 '평생 가장 건강한 한 해'를 보내진 못했지만, 항체가 바이러스를 공격하느라 열도 좀 나고, 근육통도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야지. 운동을 하다 보면 항상 근육통이 생기진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근육통이 좀 있는 날이면, '아, 이번에는 내가 임계치를 넘겼구나. 근육이 이만큼 자라겠구먼'하며 고통이 반가울 때가 있다. 올해도 그렇지 않았을까. 아팠던 만큼, 마음의 근육도 자랐겠지.


그래서 1년 뒤의 스스로에게 쓰는 이 편지는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추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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