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스를 탄다』최승희, 뭉클스토리
30대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가정을 꾸린 사람인지. 우리는 어떤 지점에 고정된다. - 작가의 말
우연찮게도 책을 받고 나니, 남편의 본가에서 신혼집까지 타고 왔던 그 720번 버스였다. 나와 남편은 720번 버스를 타고 답십리와 연신내를 오갔다. 720번 버스는 서울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큰 도로를 따라 달린다. 은평구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동안 차창밖 풍경은 낮은 주택가에서 높은 빌딩으로, 그리고 또다시 낮은 주택가로 바뀐다. 나는 30년 동안 경기도에 살았지만, 직장이 모두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빨간 버스를 타고 다녔다. 답십리에 사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혼집이 연신내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영영 탈 일이 없었을 720번 버스였다. 더불어, 이렇게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영영 몰랐을 은평구의 이야기다.
사실, 책을 받은 뒤 한참을 읽고 나서도 나는 그 버스가 우리가 탔던 버스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책을 읽는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어, 720번 버스네'하는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어쩐지, 책에 적힌 노선을 따라 읊는데 저절로 눈앞에 차창밖 풍경이 재생되더라니. 연신내에서 무악재를 넘어 광화문과 종로를 지나는 노선이 낯설지 않았다. 그 노선을 따라가는 버스 창 밖의 풍경이 너무도 선명히 그려져 위화감이 들 지경이었다.
@Ori Song
버스 기사님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다녀본 듯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동네로 이사온지 석 달이 채 안되었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에는 어쩐지 이 곳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단순히 어떤 장소에 머무는 시간이 쌓이는 것만으로는 그 동네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4년을 내리 다녔던 학교가 있는 동네를 아직도 잘 모른다. 앞으로도 갈 일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다니던 큰길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다.
반면에 4년 동안 머물렀던 첫 직장이 위치한 동네는 골목골목 훤히 꾀고 있어서, 처음 가는 목적지도 지도를 보면 단번에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비슷한 시간을 머물러도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는지가 스스로를 (은평)구민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름이 되는 것 같다. 사귐을 통해 우리의 세계는 확장하며 더 넓은 세계로 옮겨간다. 그 계절 나눴던 마음의 빛깔과 무게를 통해 나는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이 되거나, 단순히 그곳을 거쳐갔던 사람이 되기도 한다.
@bundo-kim
활동성으로 치자면, 갓 스무 살이었던 내가 서른을 목전에 앞뒀던 나보다 훨씬 더 활발히 돌아다녔을 것이다. 보고 들은 것이 적어서 그 동네를 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시선에 실렸던 무게가 우리를 그곳에 녹아들게 만든다. 평생을 은평구에 사셨던 분들이 본다면, 갈현초등학교를 알게 된 지 이제 갓 석 달 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습겠지만, 『나는 버스를 탄다』는 그런 책이다. 3개월 차 은평구민도 감히 이 동네 사람이라는 소속감이 들게 할 만큼 우리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