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모두 무림의 고수
제가 사는 집에는 고수들이 많습니다. 먼저 잔소리 신공, 빗자루 권법, 눈 흘김 신공 등 다양한 신공과 권법을 가진 집사람과, 여기에 맞서는 장남은 절정의 사춘기 반항 신공과 말대꾸 신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왜?’ 신공을 갖춘 막강 둘째가 있습니다. 이 녀석은 ‘왜?’라는 한마디로 엄청난 포스를 내뿜습니다. 또 한 명의 고수는 7살 막내입니다. 이 녀석의 최대 무기는 불통 신공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나아가 남의 말이나 생각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막강의 신공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잔소리 신공, 첫째의 사춘기 신공, 둘째의 ‘왜?’ 신공, 막내의 불통 신공에 맞서고 있는 ‘살아남기’ 신공의 절대 지존인 저입니다.
오늘도 집은 아내의 잔소리 신공과 장남의 사춘기 반항 신공과의 불꽃 튀는 대결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엄마: 씻어야지
아들 1 : 이것만 끝내고요
엄마: 씻고 해도 안 늦잖아
아들 1 : 이거 하고 씻어도 안 늦잖아요’
엄마: 야!!!!!! 씻고 하라고 했지!!!
아들 1 : 아 진짜!!! 이것만 하고 씻는다구요
이렇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이 펼쳐지는 순간 막내의 신공이 잠깐씩 끼어듭니다
‘아 둘 다 시끄러워. 엄마는 잔소리 좀 그만하고 형아는 좀 씻어라!! 내가 TV를 볼 수가 없잖아!!!’
뜬금없는 막내의 공격에 둘 다 잠시 머뭇거리지만 이내 대결은 지속됩니다.
엄마: 너 정말 말 안 들을래?
아들 1 : 엄마는 왜 맨날 내 말은 무시하는데요
엄마 : 내가 언제 무시하는데!!
아들 1 : 지금 무시하잖아요
엄마 : 이게 정말
하면서 빗자루를 드는 순간
아들 1 : 아! 알았어요. 씻으면 되잖아요. 치사하게 안되면 맨날 때리려고 하고.........
일단은 아내의 빗자루 권법이 이긴 듯합니다만 아내의 타격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둘째에게로 잔소리 신공이 옮겨 갑니다.
엄마 : 야 너도 이제 스마트폰 그만하고 씻어라
아들 2 : 왜?
엄마 : 왜 라니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빨리 씻어
아들 2 : 왜?
엄마 : 뭐가 왜야 왜는 씻어라는데
아들 2 : 아 그니까 왜요?
이쯤 되면 아내는 다시금 빗자루 권법을 사용하기 위해 무기 창고인 베란다로 향하고 이를 눈치챈 둘째는 이미 욕실로 직행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 고수는 불통 신공의 막내입니다. 막내는 지금 TV에 온 정신을 팔고 있습니다.
엄마 : 이제 TV 끄고 잘 준비해라
아들 3 : 벌써? 이제 10시 조금 넘었는데
엄마 : 10시면 많이 늦은 거야. 얼른 끄고 자러 가자
아들 3 : 나는 10분만 더 보고 잘게요 먼저 자요
엄마 : 뭔 10분만 더 봐! 빨리 끄라니까!!
아들 3 : 먼저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 : 야!!! 들어가 자라는데 뭔 '먼너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하는데!!
아들 3 : 그니까 나는 10분 후에 잘 거니까 먼저 자라고요
엄마 : 당장 가서 자라고
아들 3 : 그니까 안녕히 주무시라니까요
엄마 : 이게!!!
또다시 아내의 손에는 무기가 쥐어집니다. 아무리 고수라도 아내의 무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아들 3 : 들어간다고요. 들어가서 10분 뒤에 잔다고요!
막강한 카리스마로 고수들을 정리하는 아내의 극강 신공 덕분에 무림은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갑니다.
이제 마지막 한 명의 고수가 남았습니다. 바로 저입니다. 아내의 눈총이 저에게로 느껴지는 순간 저의 신공이 빛을 발합니다.
‘왜 이리 피곤하지? 오늘은 일찍 자야겠네. 막내도 내가 재울까? 그래야 되겠지? 막내야 아빠랑 자자’
그러면 등 뒤에서 섬뜩했던 아내의 불꽃같은 눈빛 신공이 사라짐을 느낍니다.
저는 장남처럼 반항 신공도, 둘째처럼 ‘왜?’ 신공도 막내처럼 '불통 신공'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저의 처절한 패배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저는 이 살벌한 무림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눈치 신공’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것이 제가 이 무림 세계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