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회사에 대졸공채로 입사를 하게 되면 20대라는 젊은 나이임에도 한 지점의 관리자로 발령이 난다(예외 본사 및 본부 사무직 발령 or OJT 기간 최소1년)지점 사원들을 관리함은 물론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이다. 모든 영업이 비슷하겠지만 현장은 현대판 전쟁터이다. 자신과 속한 조직원들의 생존이 걸린 싸움을 매일 치르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한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은 28살 때였다. 상사는 내게 손자병법을 꼭 읽어보기를 추천했다. 그 당시에는 책을 잘 읽지 않을 때였지만 리더로서의 두려움, 불안감 등을 조금이라도 해소 해 보고자 책을 구매해 읽어보았다. 워낙 유명한 책이었기에 잔뜩 기대가 됐다. '지피지기 백전불패'라는 유명한 말을 생각하며 손자병법에서 싸움과 전쟁의 필승 비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일단 책 내용 자체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한자에 대해 해설이 수록되었지만 머나먼 달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며, 비겁하고 겁쟁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1독을 한 후 꽤 오랫동안 손자병법이라는 책에 손 대지 않았다
손자병법의 진가를 깨달은 계기는 특별히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깊은 관심은 가지게 된 이유는 시간이 흐른 후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조금 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은 시기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해서였다. 첫 직장을 그만두기 전 손자병법을 탐독하며 하나의 메시지라도 얻었다면 그만두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땐 미처 몰랐다.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해 진골이라는 암묵적인 계급에 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자 강점인지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손자병법의 풍림화산이라는 구절만 새겼어도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실력을 쌓으며 다시 한번 기회가 오기를 차분히 기다렸을 것이다.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해 진골이라는 암묵적인 계급에 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자 강점인지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당장 취업이 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이직을 할 곳을 정하지 않음은 물론 뚜렷한 계획도 없이 이성이 아닌 감정을 앞세워 사표를 냈다. 대학교 졸업 전에는 지원한 회사의 숫자에 비해 1차 서류 합격율이 낮지 않았었다. 10군데를 지원해서 5군데에 합격한 걸로 기억한다. 두 번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입사지원을 했을 때에는 서류 합격율은 10%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퇴직금도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고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이 신경 쓰여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첫 직장을 운이 좋게 합격해서인지 그때 느끼지 못했던 취준생의 스트레스는 물론 자존감은 지하 10층까지 내려간 상황이었다. 너무 많은 탈락을 해서 '난 정말 쓸모없는 인간인가'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쯤 한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규직이 아닌 전문계약직이라는 당시에는 생소한 신분이었다. 2년 동안 평가를 통해 정규직 전환을 검토한다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심정뿐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두 번째 회사에 입사를 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 경험했던 계약직 생활은 또 다른 좌절감과 실망을 가져다주었다. 마침 tvn에서 《미생》이 방영되던 때였는데 주인공 장그래에게 여러모로 감정이입이 된 것도 나 또한 계약직이라는 신분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정규직 전환을 위해 함께 입사한 동기들끼리도 생존을 위한 경쟁 아닌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정규직으로 입사하더라도 동기들 간의 승진을 위한 생존 서바이벌을 해야 하는 건 동일하지만둘 다 경험해본 나로서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정기적으로 계약직들에게 PT 경진대회를 시켰다. 결과론 적으로 보면 PT 결과가 정규직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은 욕심이 너무나 컸었다. 지금도 떠오르는 우울한 기억이 있다. 처음 PT 경진대회를 할 때에는 2위에 랭크됐지만 그다음 대회에서는 시간을 초과해 한마디로 PT 자체를 망쳐버렸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는 KTX 안에서 울지는 않았으나 너무나 큰 상실감과 우울감에 빠졌던 경험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두 번째 회사의 근무가 내게 실망과 좌절감만 준 것은 아니었다. 2년 가까이 주로 교육을 담당했었는데 주기적으로 매일 사람들 앞에서 5-6시간씩 교육을 진행해야만 했다. 그 경험을 통해 PT 및 강연 스킬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정규직 전환을 위해 함께 입사한 동기들끼리 생존경쟁을 해야 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 2년이 되어간다는 것은 계약 기간 만료가 다가옴을 뜻했다. 계약기간 2년이 되어 회사에서 잘리는 것보다는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해 보란 듯이 사표를 내는 것이 100배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좋은 기회가 되어 계약 만료 2개월 전 다른 회사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당당히 사표를 내고 2배 가까이 연봉을 받는 세 번째 회사로 이직했다. 나중에 들은 소식으로는 동기들 중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정규직 전환이 안되었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인지 취준생 및 직장인들의 상담을 해줄 때 신분이 계약직인 곳에 지원하는 걸 부정적으로 얘길 해주는 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조건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계약직보다는 정규직을 택하길 권하는 편이다.
세 번째 회사는 경력직의 한계를 몸소 체감했던 곳이었다. 내가 입사를 한 후에도 타사에서 경력직지점장들이 많이 입사했다. 당시 근무하던 회사에는 200개가 넘는 지점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해 경력으로 오는 지점장들에게는 절대로 좋은 지점을 맡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러한 부분을 인정하기 싫지만 불편한 진실이라며 마음을 비우는 편이나 당시에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찌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이었다. 경력직은 공채와 다르게 손님으로 치부당하는 곳들이 대부분 일 테니 말이다.
이직을 하여 경력직으로 회사에 입사했다는 것은 더 이상 신입사원이 아닌 것이다. 전문적이고 본인만의 특출 난 강점이나 무기가 있어야 한다. 이와 함께 구성원들과 소통도 잘해야만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반쪽짜리 경력직이었다. 보험회사 지점장으로서 나만의 색깔을 갖지 못했다. 그동안 근무했던 회사 중 가장 힘들었던 때를 꼽으라면 세 번째 회사를 꼽을 것이다. 매일 아침 7시 회의 밤 10시 퇴근, 주말 출근 등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랐던 환경이었다. 당시 맡았던 지점은 전임 지점장들 또한 신임 지점장이라서 지점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었다. 지점장 자리가 한 달 동안 공석인 상태인 와중에 내가 발령을 받았다. 지점 평가 또한 220개 지점 중 216등이었다.
운이 좋게도 한 분의 좋은 상사를 만났고 코칭을 받으면서 지점 운영을 하는데 큰 힘을 받았다. 발령 후 두 달이 되었을 때 216등이었던 지점은 50등 안에 들며 이대로만 간다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이 내 뜻대로만은 되지 않았다. 코칭을 통해 내게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던 상사는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났으며 그 시점부터 메꾸지 못한 공백은 세 번째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채우지 못했다.
이직을 하여 경력직으로 회사에 입사했다는 것은 더 이상 신입사원이 아닌 것이다
세 번째 회사에서는 그 이후 한번 반전의 기회가 생겨 방송 촬영도 하며 신상품 매출 순위도 우수해 뭔가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지금 만약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다른 전략을 썼겠지만 당시에는 뚜렷한 파혜법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발령이 나고 후임 지점장으로 오신 분이 꼴등 지점에서 50위권에 들 수 있게끔 코칭해주셨던 상사분이었다. 그동안 보험회사에서 여직원(지점 총무) 출신으로 차장까지 올라가신 분을 딱 두 분을 뵈었는데 그 2명 중 1명이었다. 한 마디로 레전드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들은 소식이었지만 그분 조차도 그 지점을 살리지 못했다고 들었다. 위로가 되기보다는 도대체 그런 지점에서 어떻게 1년을 버티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세 번째 회사를 나오고 다시는 보험회사를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첫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랑 달리 세 번째 회사를 그만둘 때에는 나만의 비전을 세우고 철저한 플랜을 만들었다. 세 번째 직장을 그만둔 후 6개월이라는 시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그전까지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실천 없는 꿈만을 가졌다면 세 번째 회사를 나온 후에는 매일 스타벅스로 출근하며 첫 번째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다. 경제적인 자유를 누리는 순간이 온다면 평생 동안 글을 쓰며 노후를 보내고 싶은 소망이 생기던 계기였다. 하루 종일 글쓰기에 매달렸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며 가고 싶은 식당에 가며 혼자 드라이브로 무작정 떠나보기도 하며 보고 싶은 영화도 마음껏 보며 당분간 내 인생에서 누릴 수 없는 긴 휴식을 취했다.
세 번째 회사를 나온 후 매일 스타벅스로 출근하며 첫 번째 책을 쓰기 시작했다
취업 및 일과 관련된 책을 쓰기 위해 이론적으로 충분한 대비가 되어서인지 자기소개서, 면접 등 합격률은 20대 첫 취업준비생 시절보다도 더 높았다. 아니 지원서를 냈던 곳은 100% 서류 합격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교직원을 거치고 지금 다니는 보험회사로 다시 이직을 했다. 그토록 싫어했던 보험회사로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경력직의 한계, 보험회사 지점장으로서 겪었던 악몽 등 그런 부정적인 사항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스타크래프트에 쏟은 열정만큼 책을 쓰는 열정만큼 보험회사 지점장을 하면서 쏟지 못했다. 방법을 알았든 몰랐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돌아봤을 때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는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교직원으로 근무하며 이직을 결심한 후 3 군데에 합격했다.훗날 아쉬움과 미련이 남지 않을 선택이 무엇일지 고민한 후 지금의 회사를 선택했다.
다시 보험회사를 선택하고 내 꿈 또한 현재 진행형이지만 그전 직장에서 겪었던 출근이 두렵거나 지점장 일 자체가 힘들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을 쓴 이후 생애 최고소득을 매월 매년 경신했으며 그런 자신감과 만족감이 직장 생활을 하는데 열정과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곧 출간될 두 번째 책 또한 본업과 관련된 주제이기에책이 출간된다면 회사에서의 퍼스널 브랜딩 또한 가져갈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