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의 환경을 말할 때면.. 숨기고 싶은 비참한 과거와 그럼에도 간직학고 싶은 추억이 함께 공존하기에 나를 향수에 젖게 하기도 쓸쓸함에 비소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간단하게 육하원칙(나 때는 기승전결보다는 육하원칙이 더 유행했다)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누가
필자인 나는
언제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어디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학교에서
무엇을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어떻게
동급생들에게 왕따 지금은 학교폭이라 하는 것을 당하였다
왜
가정형편이 어려웠기에 이사를 하는 곳마다 열악한 환경과 수도는 지하수를 퍼서 식수로 사용하였고 나는 민감성 피부이기 때문에 샤워를 할 때마다 생기는 두드러기 때문에 제대로 씻지를 못하였다 심지어 방과 후 집에 오면 나는 마을 산에서 뛰어놀았기에 당시 "이"라고 불리는 벌레가 머리에 붙어 번식하고 매번 가려움에 괴로워했으며 친구들이 알고 난 후 난 극심한 왕따를 당했다.
나는 왕따를 당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안쓰럽거나 연민이나 인류애를 느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사이코패스라고 느낄 만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고 전혀 동요를 할 수가 없다
같은 학년의 모든 아이들은 나를 괴롭혔고 선배, 후배 가릴 것 없이 나를 무시하고 경멸하였다
심지어 선생들도 이런 나를 외면했고 나를 쉬는 시간마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초 둥 학생들은 순수하다거나 여리다거나 천사 그따위 말을 들을 때면 속에서 신물이 날 만큼 역겨웠다
먹던 물이나 음식을 던지던 아이도 있고 쉬는 시간이면 내가 짐 검다리라는 마냥 밟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으면 사물함의 책들은 섞은 우유에 절여져 있기도 부지기수였고 용돈으로 받은 돈은 내놓으라는 말만 하지 않았지 쉬는 시간이나 내가 엎드려있는 순간이나 호시탐탐 훔쳐가기 일쑤였고 모두가 누가 훔치는지 알면서도 방조하였다
이 모든 일은 11살부터 시작되었고 중학교에 가면서 여자중학교, 남자중학교로 갈리면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나 또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더 이상 굴하지 않고 밀어붙이게 되어버렸다
왕따 당하는 것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12살부터 나름 살로라도 몸을 키웠고 유도를 하면서 체력을 다졌다
중1 때부터 우리 나이 애들을 통틀어 내가 처음으로 담배를 폈고 질 나쁜 언니 오빠들을 만나며 성격을 개조했다
더 이상 화를 참지도 않았고 마음에 안 들고 짜증 나는 일이 생기면 바로 화를 내고 받아쳤다
촌동네 일진들은 착하다
나쁘다고 해도 외박 한번 안 하고 부모님이 난처한 일은 만들지 않았다 경찰서에도 한번 오게 한 적이 없으며 학교도 선생의 잘못을 제외하고 내가 사고 쳐서 모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흔한 폭력 사건 하나 없이 그저 나의 분노는 더 이상 참지 않는 것으로 표현이 되었고 단지 술과 담배를 시작한 나이가 빠를 뿐이었다.
아버지는 이기주의자였고 엄마가 버는 수입은 전부 아버지의 유흥비로 탕진했다
친오빠와 나는 지금까지도 아버지께 받은 용돈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이며 오빠는 중학생 때부터 나는 고1부터 우리들은 용돈이나 살아가는 데 있어 부모한테 받는 모든 지원은 받지 못했다
나도 고1부터 알바를 시작했고 오빠도 중학생 때부터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읍내에 나가면 인사하기 바쁠 만큼 작은 동네였기에 가능했다)
어머니는 술만 먹으면 자신을 패고 수십 번의 바람을 피워도 우리를 위해 이혼하지 않으셨다 자신이 번 돈을 남편에게 모두 주면서도 이래야 우리들이 안전하고 조용히 하루가 지나간다며 이 악 물고 버티셨다
나와 아버지가 칼부림을 하고 나서야 엄마를 고향에서 모시고 나올 수 있었고 이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26살 친오빠는 30살이었다
아버지가 나한테 맞아서 한동안 말을 못 할 만큼 크게 다치셨다
그때 참아온 유년시절의 모든 분노가 한 번에 터졌던 날이고 엄마를 방안에 넣고 문을 걸어 잠그고 낫을 든 아버지와 몸싸움을 했다 비가 오던 날이고 마당은 난장판이 되었으며 몸싸움에 서로의 옷은 다 찢길 정도였다 집에 경찰차만 서너 대가 출동했다 당시 집이 외곽에 한채만 덩그러니 있는 데다가 집까지 들어오는 도로가 끝나는 지점이고 그 도로의 일부분이 우리의 땅이라 지나가는 행인이나 차조차 없는 고립된 곳인데 엄마의 다급한 신고가 경찰들도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셨나 보다
나는 학교폭력과 가정폭력 모두 겪은 아이다.
지금도 아이다. 나는 우울증과 조울증이 동시에 찾아와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병원에서는 유년기 때부터 이어진 것이니 이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 하셨고 난 진료를 포기했다
잠 못 자는 거 불안함에 손톱을 죄다 물어뜯어 피가 날 정도에 스트레스로 극심한 두통도 한 번씩 찾아오는 나도 기억하지 못할 자해의 상황조차 이제 와서 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9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난 혼자 사시는 아버지와도 연락을 하고 어머니와도 잦은 왕래로 한 달을 번갈아 가시며 친오빠와 함께 모시고 있다
악몽 속에서도 함께 물놀이를 갔던 기억 돈이 없어 차에서 잠을 이루어야 했지만 해운대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기억 술주정이 심해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하셔서 먼 길을 술 취한 아빠와 걸었던 기억 모든 유년기의 기억이 나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이 조차 24살 직장에서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모텔에 가서 수면유도제를 100알 넘게 먹고 3일간 사경을 헤매고 나서야 알았다
이런 삶이라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다고
그 후에 이 모든 악몽은 나에게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되었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와 비슷하게 나는 개인주의로 자라왔고 돈에 있어서는 칼같이 득실을 따지던 성격이기 때문에 엄마 생신이다 명절이다 용돈 드리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드렸다
내가 힘들게 번 돈 아무리 부모님이라 해도 단돈 만원도 쥐어드리기 아까웠는데 30살에 처음으로 쥐어드렸다
생각보다 너무 행복하더라
단돈 10만 원인데 그 돈을 받고 우는 엄마 모습보고 죄송하고 후회되더라
내가 10년 전에 죽었다면 지금의 이 행복은 느낄 수 없었겠지
오래된 친구 하나가 그러더라 진짜 죽을 생각이었다면 넌 옥상에서 뛰어내렸을 성격이라고 실패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수면제도 아니고 수면유도제를 먹었던 건.. 죽고 싶은 마음도 강했지만..
폭력가정에서 자란 애들은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특히 술 먹고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 아래 자란 아이들은.. 내일 당장 죽어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편하게 자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하지 못하던 모든 것을 소설책으로 대리만족하며 꿈을 꾸었다
이런 내 환경이 내 처지가 소설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고 소설책이 나의 유일한 친구이며 나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작가의 길을 다짐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면지에 글을 적어 친구에게 피드백을 요구했지만 이면지를 썼다는 이유로 어디서 읽기 쪽팔린다며 나에게 넌지시 전해왔다
그땐 그게 부끄러웠다
정작 작가가 꿈이라면 내 글이 쪽팔린다고 해야 내가 부끄러워야 하는데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보이는 것에 많이 예민했기에 그 후에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과거를 생각하면 향수에 젖고 쓸쓸함에 비소가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나를 향수에 젖게 해주는 추억이고
나에게 후회되거나 슬픈 기억은 나의 인생은 내가 바꿀 수 있는데 진작에 바꾸지 못했던 것이다.
가정폭력도 학교폭력도 당할 수 있다.
내 인생의 소중함을 너무 늦게 알았기에 나는 그저 당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묵인해 버렸고 그 후 나타난 트라우마를 그저 수치스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숨기기 급급했다는 것
내가 지금 제일 슬프고 화가 나는 것은.. 그때의 내가 당당하지 못했음이다.
이미 내 글을 둘러보면 내가 몇 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내 글에 내 고향에 대한 글이 올라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글을 올리는 계기로 고향과 관련되는 그 어떠한 글도 올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학교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아빠 친구의 자녀들 엄마가 아는 사람들의 자녀들로 가득하다.
나는 용서할 마음도 사과를 받을 마음도 없다
언젠가는 만날 너희들 이제 우리 다 결혼하잖아, 결혼했잖아 언제 어디서 만나든 난 당당하게 너희들을 아는 척할 거고 친한 척 오지랖 넓게 대화를 걸겄이며 너희 배우자에게 너희 자녀들이 있어도 너희들이 한 일을 말하며 뻔뻔하게 추억을 회상하는 듯 연기할 것이다
팁을 하나 주자면 내가 내 고향에서는 최초로 고배기량 알차를 탔던 여자이고 유일하게 아직도 우리 동네에서는 튜닝카를 타는 여자라는 것 한 달에 한 번에서 두 번은 아버지를 뵈러 고향에 가지만 스치듯 지나다니면서 나를 본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내 연락처는 쉽게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단 한 명의 인간에게서 지금까지도 미안하다는 사과를 들은 적이 없다
그저 내가 달라졌고 이젠 내 인생에 나에게 더 당당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중1 때 보다 더 거침없어졌고 더 개인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너희들이 나에게 준 호의를 이제 권리라고 생각할게
소설을 좋아하게 된 유년기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셨는데 본의 아니게 어제부터 자꾸 브런치가 분노표출의장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드네요.. 어제 일로 더 날카롭게 글이 나온 듯합니다
새벽에 올라온 글과 이 글은 한 달 후 삭제 하겠습니다.
하지만 웹소설의 기본은 내가 겪은 일입니다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요 제가 학원물을 쓰게 되면 정말 잘 표현할 자신이 있는데..
학교폭력을 당하는 자녀를 둔 부모님께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도 전학이야기를 자주 했고 중학교는 이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학교 폭력은 근절이 어렵습니다
저때는 그래도 돈보다는 학연 지연이 더 강하고 공권력이나 경찰을 무서워하던 시절이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학교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만든 우리들의 잘못입니다
아이가 간절하게 원한다면 전학시켜 주세요 어정쩡하게 근처 학교로 보내지 마시고 굳이 수도권이 아니라도 상관없잖아요
저도 배운 거 없이 자랐지만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잘 자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