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스물 두 살, 나는 혼자 유럽 여행을 떠났다. 3개월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동안 홀로 이나라 저나라 쏘다니며 보고 느낀 것이야 물론 많겠지만 당시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벌거벗은 나라는 사람'을 처음 들여다 본 시간이었다는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스물 두 살은 마치 초등학교 2학년 같이, 아직 처음해 보는 것들이 너무나 많을 나이라 당시 느낀 좌절감과 당혹감이 하찮고 귀엽게 느껴진다. 스스로를 혼자인 시간을 잘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 여기며 호기롭게 떠난 여행에서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외로움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들과 일일 여행 메이트가 되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귀찮은 마음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 속으로 "쟤는 누구야? 난 저런 애 모르는데" 하는 마음이 둥실 떠올랐다. 스스로를 외향(E)이 90%, 내향(I)이 10%라 여기던 믿음이 외향(E)이 55%, 내향(I)이 45%정도로 조정되기도한 시간이기도 했다. 철저한 것 처럼 보이지만 계획을 잘 세우는 편은 아니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사람처럼 준비했으면서 계획대로 한 것은 거의 없는 스스로를 다섯살 난 아이 데리고 다니듯이 어르고 달래가며. 일정보다는 나를 소화하는 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썼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던 혹은 희망하는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깨고
엉망인 구석이 제법 많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은 유럽의 광장의 한 가운데에서 발가벗고 선 것 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처럼, 자신을 바로 보고난 후에야 그로부터 얼마간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나를 성찰하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알았다는 사실은 나의 이십대를 이끌었다. 자존감에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려는 사람을 걸러낼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을 지나치게 괴롭게 하는 연애도 금방 끊어낼 수 있었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의 이유를 찾고 그러지 못할 때에도 최소한 합리화를 잘 해가며 나름의 인생을 꾸려나가는 것 같았는데.
그랬는데.
그러던 어느 날,
발가벗기만 한 내가 아니라 발가벗은 내가 모든 광장을 쏘다니며 난동을 부리고 있다.
그를 지켜보며 "쟤 왜저래? 미친거야?" 싶은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식사 시간보다 빨리 돌아온다.
육아를 시작했기 때문이랄까.
육아가 스스로의 밑바닥을 보게 한다는 것은 너무 고상한 표현이었다.
마음 속에서 칼춤을 추며 난동 피는 미친 벌거숭이를 잡아들여 다시 실오라기라도 걸치게 하고, 칼 대신 부채를 쥐어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조금 과격하지만 더 와닿는다.
미친 벌거숭이는 물론 나 자신일 터.
왜이렇게 내 자식들에게 더 너그럽지 못한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는 십분 발휘되는 인내심이 왜 가족 앞에서는 이리 박한지.
다정한 사람이 제일 좋다고 하면서 딸래미에게 밥 투정 좀 하지 말라는 말은 왜이렇게 사납게 나오는지.
쓰기도 민망한 별 일 아닌 일들에 열통이 터져 얼굴이 벌개진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는지. 저 칼춤 추는 미친 벌거숭이가 정말 나인지 받아들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처는 반복되면 무뎌지거나 극복할 방도를 찾게 된다. 적어도 내가 겪어온 대부분의 상처들이 그랬다. 굳은 살이 박이는 것 처럼 더이상 처음만큼 아프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육아의 과정에서 생기는 어떤 상처들은 참 무뎌지기가 어려웠다. 아이의 사소한 잘못이 여러 차례 반복될 때 차분히 이유를 찾고 고쳐나가며 괜찮다고 토닥여 주는 엄마이고 싶은데 실상은 칼춤추던 미친 벌거거숭이가 '야!!!!!!!!!' 하고 소리치며 나타나 잔소리 폭격을 시작하는 모양새였다.
출근 전에 아이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나서는 혼자 울면서 출근을 한 적도 몇 번이나 있다. 아이를 향한 모진 말들이 결국 나를 아프게 한다. 나는 아직 저 미친 벌거숭이가 진정 내 모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럽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내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밑바닥을 이렇게 자주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사실도 괴롭다. 아이의 성장에 따라 나의 마음도 그릇을 키워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자괴감이, 어떤 날에는 나를 아주 주저앉혀버린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의 첫 번째 속내에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칼춤을 추는 벌거숭이가 들었다.
그를 마주할까 두려워 꽁꽁 숨어버린 자아도 어딘가 있을 터이다.
겉으로는 아이를 키우고
속으로는 나를 키워내야 하는 과정 속에서
너무 자주 칼춤의 끝이 나를 향해있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