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9월 중순이다. 낮에는 여전히 여름의 기운이 남아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르지만, 그 뜨겁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얇은 이불을 찾게 되고, 웅산 자락을 오르면 길바닥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여름을 지나온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내려놓는 모습은, 마치 삶의 어느 시점에서 내려놓을 것을 고민하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느껴진다. 자연의 이치는 거스름 없이, 순리대로 흘러간다.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여름엔 무성해지며, 가을엔 열매를 맺고, 결국 겨울로 향한다.
인간사도 그런 순리를 따르는 게 아닐까. 살아갈 때는 종종 지그재그로 걷거나, 우연과 변수의 연속처럼 느껴지지만, 한 걸음 떨어져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 모든 일은 결국 어떤 필연 속에 있었던 듯하다. 인생의 가을 문턱을 넘은 지금, 나도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저 열심히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마음 한편엔 적지 않은 아쉬움이 스친다. 더 가질 수 있었음에도, 더 이룰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한 순간들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가지려 했고, 너무 이루려 했던 지난날의 과욕이 자꾸 떠오른다. 더 높이 올라야만 살아 있는 것처럼 여겼던 그 시절의 나였으니까. 그 치열함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을까.
2007년 1월, 50대 중반의 나이에 위암 수술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병실의 하얀 천장 아래에서 나는 처음으로 멈춰 섰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큰 병은 우리를 멈추게 만든다. 그간 쫓기듯 살아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가족을 위해, 성취를 위해, 체면을 위해... 내 삶의 무게 중심은 늘 '더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에 있었던 듯하다. 특히 40대는 자녀 양육과 연구 실적, 그리고 각종 사회활동에 모든 정성을 쏟던 시기였다. 그때 한 템포만 늦췄더라면 어땠을까. 요즘 아내와 그 시절을 돌아보며 종종 아쉬움을 나누기도 한다. 회복실에 누워 있던 어느 날, 퇴근 후 병실에 들른 한 40대 후반 쯤 되는 남편이 깡마른 아내와 창가에 기대어 조용한 듯했지만, 절실하게 대화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부인은 아마 이승에서의 삶이 오래 남지 않았던 듯했다. 개개인의 삶은 그토록 절박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태연히 흐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병실의 창가엔 어김없이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 햇살이 그렇게 따뜻하고 귀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 즈음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순리대로 살아야겠다고.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만 살아진다면, 그것은 이미 수행자의 삶일 것이다. 병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오자 나는 다시 작은 욕망들과 마주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는 마음, 회복된 건강 위에 무언가를 쌓고 싶다는 부담으로. 그 즈음 나는 현직에서 천천히 정리해 가던 시기였는데, 병실에서 다짐했던 '순리대로'는 점점 흐려지고, '덤으로 얻은 삶이니 더 적극적으로 살아보자'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물론 이는 긍정적인 각오일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또 다른 과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의 변화는 언제나 밝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퇴직을 앞두고, 나는 '경제적 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과욕의 복병과 마주했다. '이번엔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 '남은 시간을 더 의미 있게 써야지'라는 조급함이 내 판단을 흐렸다. 결국 그 선택의 후유증은 지금도 내 일상을 따라다닌다. 큰 병을 겪으며 삶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다짐했지만, 또다시 욕망의 길목에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 것이다. 후회한들 돌이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늦음조차 삶이 주는 또 하나의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을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열매의 무게이자, 잎을 떨굴 줄 아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요즘은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낙엽 쌓인 웅산의 자갈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바람처럼 스며드는 생각들이 있다. 마음속에도 어느새 가을바람이 불고, 오래된 기억과 아련한 후회들이 함께 따라온다. 여름의 뜨거움과 겨울의 냉기가 만나는 이 계절처럼, 나 역시 치열함과 고요함 사이에서 길을 찾는 중이다. 인생의 가을은 지나온 삶을 수확하는 시기이면서도,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묻는 시간이다. 나는 이제 욕망의 무게를 덜어내고, 더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더디더라도, 조금 부족하더라도, 자연의 순리처럼 흘러가는 삶으로. 그것이 아마도 내 삶의 가장 단정한 속도이자, 가장 진실한 모습 아닐까 싶다.
오늘도 나는 웅산을 오른다. 그 길 위에서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인생의 가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흔히 말하듯, 남은 날들이 덤이라면, 나는 그 덤을 순리대로 그리고 단정하게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