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를 다시 걷는다면

다대포의 추억

by 이천우

다대포를 다시 걷는다면



청춘의 추억은 아름답다


세월은 참 빠르다. 눈을 감으면 어제처럼 또렷한 장면들이 떠오르는데, 그 시간을 함께한 어떤 사람과는 어느새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50대까지만 해도 가끔 전화로 안부를 전하던 L씨와는, 둘째 아들을 떠나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그 말을 들은 뒤 나는 한동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시간이 멈춰버린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도 일흔을 넘겼다. 잘 지내고 있을까. 바람처럼 스미던 그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가을 햇살이 은은한 오후,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간다.


기억 한 장면, 다대포


둘 다 20대이던 시절, 감정이 앞서던 그때 우리는 함께 한적한 다대포 산책길을 걸었다. 나는 대학원생, 교수 연구실에 가끔 들르던 L양은 학부생이었다. 부산의 서쪽 끝, 다대포 해변은 우리에게 세상의 가장 조용한 모서리처럼 느껴졌다. 햇살은 잔잔한 바다 위에 부서졌고, 언덕의 활엽수 잎들은 바람에 살랑거렸다. 이름조차 모르던 들꽃들이 길가에 피어 있었고, 그 소박함이 우리 사이의 대화와도 닮아 있었다.

그날, 처음 데이트를 한 나는 조금은 서툴렀고, 동시에 담대했다.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서로의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살짝 기울이던 그 순간, 우리는 같은 높이에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 장면은 지금도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마치 시간 속에 한 컷으로 정지된 풍경처럼. 웃음과 바람이 뒤섞이던 그 찰나, 말이 없어도 모든 것이 전해졌던 그날의 아련한 모습으로. 수많은 계절이 지나도, 이상하게도 그 산책은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


소식이 끊긴 자리, 말하지 못한 마음


삶은 우리 모두에게 예기치 않은 상실을 안긴다. L씨로부터 한 아들을 잃었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한참을 말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비슷한 아픔을 겪어본 나는, 위로의 말들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힘내세요’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은 그녀 곁에 있었지만, 현실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체면이라는 얇지만 단단한 벽이 나를 침묵 속에 가두고 말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자꾸 나를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창밖 구름을 보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또 어떤 날에는 책 속 문장 하나가 그리움을 건드렸다. 마음속 안부는 말로 꺼내지 못한 채, 오랫동안 가만히 떠돌았다. 닿지 못한 위로, 머뭇거리는 마음 속으로. 나는 여전히 그 조용히 흔들리는 감정을 품고, 언젠가는 전해지길 바라고 있다.


다시, 함께 걷는다는 말


나이가 들어 알게 되었다. 상실 앞에서 필요한 건 말이 아니라, 곁에 머무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무 말 없이도 함께 걷는 사람, 그 존재가 때로는 가장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요즘 가끔 생각한다. 만약 다시 연락이 닿는다면, “그날의 다대포를 다시 걸어볼까요” 하고 조심스레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그 길을 함께 걷는다면, 그날 말하지 못했던 마음들은 바람에 실려 사라지고, 침묵은 더 이상 거리감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로 두 사람 사이를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젊었던 날, 나란히 걸으며 맞췄던 그 발걸음의 리듬을 떠올리며, 이제는 친구로서 느린 걸음으로, 다정히 걷고 싶다. 안부란 말이 아니라, 그 속도 속에 스며든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햇살이 등을 감싸고,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굳게 닫혔던 마음도 조금은 풀릴 것이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시 마음을 두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남은 숙제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점점 더 얇아진다. 그러나 그 얇은 틈 사이에서도, 늦게 건네는 진심 어린 안부는 삶을 다시 이어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전화 한 통, 짧은 메시지, 혹은 조용한 산책 한 번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무엇이 진짜 소중한지를, 어떤 관계가 끝내 마음속에 남는지를.

남은 건 아주 작은 용기다.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미는 마음,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태도로도 족할 것이다. 그 시작이 있다면, 다시 이어지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날 다대포의 바람처럼, 우리의 마음도 다시 부드럽게 불어올 수 있기를.



오늘의 한 문장


“안부는 말이 아니라 발걸음의 속도다 — 다대포를 다시 천천히 함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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