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문화재 보존 문제

문화재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by 이천우

전쟁과 문화재 보존 문제


명예와 권위의 상징인 신라 금관의 제작 과정




2025년 가을, 세계의 시선이 잠시 경주로 집중되었다. 21개 APEC 회원국 정상들이 경주에 모여 ‘지속 가능한 내일을 위한 연결·혁신·번영’을 주제로 회의를 열었고, 그 성과를 ‘경주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냈다. 천년 고도라는 표현 그대로, 회의장 밖에는 옛 신라의 수도로 기능하며 남은 능선과 고분군, 사찰과 유적이 묵묵히 서 있었다. 화려한 의전과 정상들의 사진이 지나가고 나면, 결국 이 도시에 오래 남는 것은 다시 돌과 흙, 그리고 그 안에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번 경주 APEC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우리는 이 기회를 빌려 “전쟁과 격변의 시대를 통과해 살아남은 전통과 문화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지켜야 할까”라는 질문을 한 번 꺼내 보고 싶다.

이 글은 그런 마음에서 출발한다. 전쟁이 문화재를 어떻게 파괴해 왔는지, 이를 막기 위해 어떤 국제 규범과 선택들이 쌓여 왔는지, 그리고 교토·나가사키·경주·해인사·신라 문무왕릉비 조각 같은 사례를 통해 오늘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지 짚어 보려고 한다.


전쟁이 남기는 또 다른 상처, 문화재 파괴


우선 전쟁이 문화재에 남기는 상처부터 살펴보자. 전쟁은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도시의 기억과 문화재를 함께 무너뜨리는 사건이다. 폭격과 방화, 약탈은 성당과 사원, 궁전과 박물관을 군사적 표적이나 부수적 피해 정도로 취급하며 한 지역의 역사 층위를 지워 버리곤 했다. 만약 경주의 고분군과 불국사, 석굴암 같은 유적이 한 번에 사라진다면, 그것은 한 도시의 손실을 넘어 한반도 고대사의 큰 부분이 공백으로 남는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문화재가 사라지면 한 사회가 자신을 설명하고 기억해 온 물적 근거가 약해지고, 후대는 과거를 직접 마주할 기회를 잃게 된다. 따라서 전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눈앞에서 사라진 문화재와 유산을 함께 떠올려야만 전쟁이 남긴 상처의 깊이를 조금 더 정확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전리품에서 보호 대상으로의 인식의 변화

이제 시선을 과거로 돌려, 문화재가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를 보자. 근대 이전 전쟁에서 문화재와 예술품은 대체로 승자의 전리품으로 여겨졌고, 약탈은 특별히 문제 삼지 않을 정도로 관행에 가까웠다. 정복자는 패전국의 궁전과 사원, 미술품을 가져와 자기 궁전에 전시하며 권력을 과시했고, 피정복자의 문화는 지배되어야 할 것으로 낮춰 보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유럽 곳곳의 회화와 조각, 고대 유물이 파리로 옮겨졌다는 기록은 패전국 박물관 전시실의 빈 자리를 그대로 남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서서히 달라졌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런 전리품 논리를 넘어 도시와 문화유산 전체가 사라지는 경험을 인류에게 안겼고, 그 결과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 변화가 본격적으로 촉발되었다.


1954년 헤이그협약과 국제 규범의 등장


이 같은 인식 변화는 결국 국제 규범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재 파괴의 참상을 줄이기 위해 1954년 「무력 충돌 시 문화재 보호를 위한 헤이그협약」이 채택되었다. 이 협약은 교회와 사찰, 박물관과 도서관 같은 시설을 특별 보호 대상으로 규정하고, 군사적 필요가 아닌 한 공격과 약탈을 금지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더 나아가 문화재 피난 계획 수립, 목록 작성, 보호 표식 부착 등 사전 조치를 각국의 의무로 명시함으로써, 전쟁이 나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약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문화재가 자동으로 지켜지지는 않는다. 실제 분쟁 현장에서 이 규범을 얼마나 성실하게 이행하는지, 또 이를 어겼을 때 어떤 책임을 물을 것인지가 여전히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교토와 나가사키의 사례

이제 전쟁 속 한 도시의 운명이 어떻게 갈라졌는지 보여 주는 사례를 보기로 하자. 일본 교토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의 폭격 후보지이자 원자폭탄 투하 후보지에 올랐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교토는 오랜 기간 일본의 수도였고 수많은 불교 사찰과 신사, 전통 거리 경관이 밀집한 문화 중심지였기 때문에, 전후 일본의 재건과 화해를 생각할 때 이런 도시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전쟁 이전에 교토를 방문한 경험이 있던 미군 고위 인사가 그 가치를 강하게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결국 여러 논의를 거쳐 교토는 원자폭탄 투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대신 나가사키가 최종 목표가 되었다.


KakaoTalk_20251106_전통이 있는 교토거리.png


이 선택은 한 도시의 문화유산은 남고, 다른 도시의 일상과 삶이 파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교토는 비교적 온전한 전통 경관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고도(古都)’의 이미지를 유지하며 관광과 문화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있지만, 나가사키는 핵 공격의 상처를 안은 도시로서, 평화와 비핵을 이야기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교토와 나가사키의 대비는 전쟁이 도시의 운명을 어떻게 갈라놓는지, 그리고 문화재 가치를 고려하는 결정이 어떤 장기적인 결과를 낳는지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천년의 문화와 신라 문무왕릉비 조각


이제 시선을 다시 한반도로 옮겨 보자. 경주는 통일신라 이래 오랜 기간 신라의 수도로 기능하며 1000년에 걸친 시간을 통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산이 된 공간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유적 발굴과 조사라는 이름으로 수탈과 훼손이 동시에 일어났고, 일부 유물은 해외로 반출되었다. 이어 8·15 광복 이후에는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유적 보존과 도시 개발을 어떻게 병행할 것인지가 꾸준한 과제가 되었다.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경주의 주요 유적이 전면적인 파괴를 겪지는 않았지만, 국가 전체가 전쟁과 가난에 시달리던 시기에 문화재 보존이 언제나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경주 천년의 문화는 식민지 지배, 광복, 전쟁, 산업화와 관광 개발을 겪으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 경주에서는 한 조각의 돌이 어떻게 도시의 깊은 기억으로 다시 돌아오는지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도 있었다. 2009년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 수돗가 바닥에 박힌 큰 돌 하나를 수도 검침원이 우연히 보고, 글자가 새겨진 것을 이상하게 여겨 신고한 일이 있었다. 조사 결과 그 돌은 사라졌던 신라 문무왕릉비 조각으로 확인되었다. 그 비편이 어느 틈엔가 마당 수돗가 바닥으로 옮겨져, 집주인의 일상 속 평범한 돌 하나로 섞여 있었다. 정작 중요한 지점은 따로 있다. 바로 경주의 시민과 검침원의 눈, 그리고 “이상하다”고 느끼고 신고한 한 사람의 행동이 없었다면 이 조각은 여전히 이름 없는 돌로 남았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전쟁과 식민지, 개발의 시간을 통과하며 흩어진 조각이 이렇게 일상 공간 속에서 다시 발견되고, 박물관으로 돌아와 전체 비문과 맞춰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경주가 “유산을 지키는 사람들의 도시”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KakaoTalk_20251106_첨성대.png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사랑한 지휘관의 선택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를 폭격 목표에 포함시키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실제 출격한 공군 지휘관이 임무 수행을 중단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만약 해인사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면 사찰 건물뿐 아니라 목판 인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팔만대장경 전체가 단번에 사라졌을 가능성이 컸다. 이 일화의 세부 경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전시라도 한 사찰과 경판의 가치를 따로 생각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오늘날 팔만대장경은 정교한 보존 환경과 디지털 촬영을 통해 다시 한번 ‘지식의 창고’로 관리되고 있다. 전쟁 중에 폭격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 하나가, 지금 세대와 미래 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방대한 기록과 신앙, 사유의 축적을 지켜 냈다는 점에서 이 사례는 전시 문화재 보존의 의미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대장경 장경판.png


냉전 이후 분쟁과 세계유산 파괴


이처럼 일부 도시와 유산이 간신히 살아남기도 했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는 또 다른 양상의 파괴가 계속되었다. 국가 간 전면전보다 내전과 종교 갈등 속에서 문화재가 직접 표적이 되는 일이 두드러진 것이다. 사라예보 도서관의 붕괴, 모스타르 다리의 폭파, 바미안 석불의 파괴, 팔미라와 님루드 유적의 훼손 등은 모두 특정 민족과 종교의 역사와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폭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국제 사회는 제재와 형사 재판, 긴급 복원 프로젝트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문화유산 파괴를 전쟁범죄로 다루려 하고 있다. 이는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최소한의 규칙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과 시민, 그리고 우리가 던지는 질문

전시 문화재 보존은 점점 디지털 기술과 현장 시민의 실천이 결합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3D 스캔, 위성사진, 다중 스펙트럼 영상 기술, 가상현실 등은 문화유산을 더 세밀히 기록하고, 더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술이 정보를 지키는 장치라면, 시민의 관심과 감각은 그 정보를 찾아내고 움직이게 하는 촉수에 가깝다. 그리고 그 촉수는 결국, 문화재가 단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간다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어갈 것인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기억과 유산을 지키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

결국 일반 시민에게 전쟁과 문화재 보존의 문제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문화재를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한 사회의 기억과 상처가 겹쳐진 복합체로 인식할 때, 우리는 파괴 소식 앞에서 무력감만이 아니라 책임 의식을 함께 느끼게 된다. 이번 경주 APEC의 성공적인 개최는, 이 도시가 경제·외교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기억과 전통의 무대라는 사실을 세계에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이제 회의가 끝난 자리에서 우리는 각자에게 조용히 물어볼 수 있다. “천년의 시간을 견딘 이 문화와 유산을, 앞으로 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

이 물음은 단지 특정 도시의 보존 계획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 우리는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길 책임이 있는지를 되묻는 질문이다. 문화재는 단순한 돌덩이나 유물이 아니라, 한 사회가 품어 온 정신과 가치,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노력이 새겨진 ‘정신문화의 유산’이다. 이 질문이 하나의 작은 여운으로 남는다면, 화려한 정상회의의 조명 너머에서 경주의 문화재들은 또 한 번 제 역할을 다한 셈일 것이다.


요컨대, 전쟁 속에서 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단순히 돌과 흙을 남겨 두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APEC으로 다시 주목받은 경주의 천년 문화와 교토·나가사키·해인사, 그리고 어느 집 마당의 문무왕릉비 조각까지를 아우르는, 인류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은 그저 과거의 흔적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그 책무를 나누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문화가 전쟁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de566902-안압지.png


#전쟁과문화재

#문화유산보존

#역사기억

#전시유산보호

#경주APEC
#교토와나가사키
#해인사팔만대장경
#문무왕릉비

#정신문화의유산
#기억의공간
#시민의책임
#미래를위한보존

keyword
작가의 이전글느긋함의 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