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로부터 실감하는 나이듦

계절의 변화와 나이듦

by 이천우

계절의 변화로부터 실감하는 나이듦


앳된 모습에서 늙은이 모습으로


10월 말 어느 아침이었다. 늘 그렇듯 웅산을 오르는 나는 입구에 서서 등산화 끈을 한 번 더 조여 매고, 숨을 고른 뒤 산길로 들어섰다. 목재체험장 아래 소류지에 다다르면, 하얀 수련 몇 송이가 먼저 나를 맞이하던 계절이 얼마 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습관처럼 물가에 서거 팔을 난간에 걸치고 내려다보았을 때, 수면 위에는 꽃이 한 송이도 없었다. 물 위를 뒤덮었던 둥근 잎들만 너덜너덜 남아 있고, 물빛은 벌써 겨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풍경을 보는 순간 마음이 먼저 텅 비었다. 그 자리를 메운 건 “아, 또 한 계절이 끝났구나” 하는 아주 단순한 슬픔이었다. 계절이 하나 접히는 속도가, 내 나이 드는 속도와 겹쳐 오는 느낌이다.


문득 가득 찼던 여름의 장면이 떠올랐다. 초여름 어느 날 아침, 처음 하얀 수련이 눈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하얀 꽃이 아름답네” 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발걸음이 멈췄다. 물 위에 얌전히 떠 있는 하얀 꽃들이, 행여 내가 그냥 지나칠까 봐 일부러 기다려 준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한여름이 되자 그 사이로 분홍 수련이 섞여 나타났다. 이른 오전, 물 온도가 오르며 봉오리가 천천히 열리고, 정오 무렵이면 흰색과 분홍이 뒤섞여 소리 없는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 시간에 맞춰 소류지에 도착하면, 나는 물속의 잉어와 붕어, 물 위의 수련,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까지 한 화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운동하러 왔다가, 어느새 묘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젊을 때의 나는 이런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진달래가 붉은빛을 뽐내며 손짓해도 “아, 봄이구나” 정도로 받아들이고 지나쳤을 뿐이다.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출근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야 했고, 학생들을 위한 강의와 논문 준비에 분주했고, 저녁에 아이들을 챙길 일로 머리가 늘 꽉 차 있었다. 대학 캠퍼스 길가의 장미나 화단에 핀 꽃은 말 그대로 배경이었다. 그때의 나는 꽃을 보는 눈보다 시계를 보는 눈이 훨씬 예민했다.


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건 50대 중반, 위암 수술을 겪은 뒤부터다. 병실 침대에 누워 링거 줄을 바라보던 시간, 새벽마다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에 깨던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이 더 이상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이들은 이미 각자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났고, 학교에서도 한발 물러나 있었다. 이름은 또렷이 기억되지만 연락하기가 어쩐지 서먹해지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해야 할 일보다 피해야 할 검진 목록이 더 많아진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때에서야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추상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체감하는 상황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언젠가 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라는 것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내가 바라보는 웅산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봄이면 산길 옆에서 어설프게 고개를 내미는 진달래와 이름 모를 들꽃들을 먼저 찾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산기슭의 나무 사이에 섞여 보이던 것들이었다. 여름과 초가을에는 소류지의 수련과 숲속 그늘에 모여 피는 작은 꽃무리들이 계속 눈에 선명해졌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들이 초록에서 노랑, 주황, 붉은 갈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과정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본다.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야 비로소 푸른 소나무가 얼마나 더 푸르른지 이해하게 된다. 자연은 어느 계절에도 빈손으로 오지 않았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바빠서, 혹은 살기 급해서 그 선물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니, 놓치고 지나온 내 인생의 장면들도 함께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소류지의 수련을 바라보며 나는 자주 “아름다움이란 뭘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수련을 안 본다고 밥을 굶는 것도 아니고, 옷처럼 몸을 가려 주는 것도 아니고, 집처럼 비바람을 막아 주지도 않는다. 쓸모를 따지면 언제든 가장 뒤로 밀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나는 수련이 피는 시기에 예쁜 모습을 찍어 두고, 한 송이 한 송이 색이 조금씩 다른 걸 유심히 들여다보고, 10월 말 꽃이 사라진 소류지 앞에서 괜히 서성인다. 이건 어쩌면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인식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생기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생존에 직접 필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일부러 발걸음을 멈추는 행위,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가끔 사치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 사치를 허락하는 순간, 나는 늙어가는 스스로를 조금 더 존중하게 된다. 나이듦이란, 쓸모만 따지던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쓸모없는 것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더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수련은 물이 충분히 따뜻해지는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피고, 이른 아침에 꽃을 열었다가 오후에 다시 닫힌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괜히 서운해하지는 않는다. 아무 때나 가서 “왜 오늘은 없지?” 하고 투덜대던 태도에서 “네가 가장 예쁠 때 내가 맞춰 올게”라고 내 생각을 바꿨다. 아침 시간에 맞춰 산에 오르다 보면, 자연의 리듬에 조금씩 나를 맞춰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평생 학교의 일정과 학생들의 시간표에 나를 맞추며 살아온 세대가, 이제 들어서야 늦게 배우는 조율법이 아닌가 싶다. 나이듦은 내 속도만 고집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리듬에 자신을 맞추어 보는 일이라는 걸, 수련으로부터 배우고 있는 셈이다.


요즘 나는 웅산을 오르며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꽃이 피고 지고, 잎이 푸르렀다가 붉어지고, 다시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는 과정을 해마다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 그 자체가 말 없는 가르침이라고. 인생의 봄과 여름엔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연구 실적, 자녀 교육, 대출 상환... 그때의 나는 “지금 이 순간”보다 “언젠가 나아질 미래”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제 인생의 가을에 서 보니, 이미 지나간 것들과 언젠가 다가올 겨울이 한 화면에 들어온다. 그 사이에서 오늘의 수련, 오늘의 단풍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함께 깨닫는다. 어떤 날은 여전히 운동량만 채우고 후다닥 내려오고 싶고, 어떤 날은 숨이 차서 꽃이고 뭐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이 든다고 해서 갑자기 느긋하고 지혜로워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된다.



그래도 웅산은 내게 조금씩 다른 얼굴로 말을 건네는 배움터가 되고 있다. 소류지의 수련, 산길의 들꽃,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잎, 멀리 아른거리는 진해만의 수평선까지, 그 모든 것이 “당신은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겁니까”고 묻는 듯하다. 나는 아직 그 질문에 완벽하게 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산을 오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이 길을 오르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 소류지 물 위에 비친 가을 하늘을 눈에 넣기도 하면서 가슴 깊은 곳에까지 담아 두려 한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 배우는 나이듦의 방식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이런 조용한 인사를 하루하루 건네는 일일 것이다. 그게 내가 보낼 수 있는, 인생의 가을을 향한 가장 솔직한 인사라고 믿으면서.


여름 어느 날 웅산 소류지의 수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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