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의 돌길 모퉁이에 서서
종묘 입구에 들어서며
이번 가을 학기에 나는 DCU 유스티노 캠퍼스 교리신학원에서 주자학 강의를 수강한다. 매 시간마다 성리학의 중심에 있는 '예(禮)'와 '효(孝)'가 반복되지만, 그 말들은 오랫동안 책 속에 갇힌 문자처럼만 느껴졌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현실에서는 각자도생으로 살아가는 시대에 동떨어진 세계, 다른 시대의 언어 같았다.
그러다 11월 21일(금), 교수 신부님의 인솔로 수강생들과 함께, 성리학 국가가 추구한 조상 제사와 예(禮)의 정신이 가장 농축된 무대인 종묘(宗廟)를 찾아 견학에 나섰다. 서울 하늘은 뜻밖에 맑았고, 정문을 지나자 회색 돌이 넓게 깔린 마당이 펼쳐졌다. 그 돌길 가운데로는 신도(神道), 어도(御道), 세자도(世子道)라 불리는 세 줄의 길이 길게 나 있었다. 안내판 아래 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문장은 평소 같았으면 의미 있게 다가왔을 텐데, 이날은 오히려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설사가 말했다. "이건 단순한 길이 아니라, 위계의 지도입니다. 누가 어디로 다녀야 하는지를 땅 위에 새겨놓은 거죠." 우리는 가운데 신도를 피해 양옆으로 나뉘어 걸었다. 지금은 왕도, 제사도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선을 피해 걷는 우리의 모습이 묘하게 숙연했다. 실수로라도 중앙을 밟을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조상과 신, 왕과 신하가 질서를 지키던 공간에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잠시 끼어든 기분이었다.
돌길을 따라 올라가니 정전이 길게 누워 있었다. 사진으로 볼 땐 웅장하고 화려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단정하고 절제된 인상이 먼저 다가왔다. 배가 살짝 불룩한 배흘림 기둥, 조용히 수평을 이루는 지붕, 19칸이 반복되는 긴 구조. 해설사는 말했다. "여기가 조선 왕조의 심장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토록 중요한 곳인데, 왜 이렇게 단순할까.' 색도, 장식도 꼭 필요한 만큼만 허용된 공간이었다. 성리학이 말하던 절제와 예가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7칸뿐이었던 정전(正殿)이, 왕과 왕비가 늘어날 때마다 동쪽으로 계속 확장되었다고 한다. 조상이 많아지자 태조의 윗대 조상은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해설사는 농담처럼 말했다. "조상도 자리를 옮겨야 했지요." 모두 웃었지만,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기억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뜻이니까. 누구는 중심에 남고, 누구는 들어오지도 못했고, 또 누구는 옆으로 밀려난다. 고려의 마지막을 지키려 했던 공민왕이, 결국 새 왕조를 연 이성계의 손으로 종묘 한켠에 조용히 모셔졌다는 설명은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효라기보다는 정치적 기억의 재편에 가까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설명을 듣다가 문득 내 노트북 폴더가 떠올랐다. 지우지 않고 남겨둔 파일들, 이름을 바꿔 구석에 밀어놓은 파일들, 그리고 용량 때문에 삭제해 버린 것들. 왕조의 정통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 역시 매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잊을지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국가도, 개인도 결국 기억을 편집하며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이 새삼 또렷해졌다.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여러 부속 건물이 이어져 있었다. 왕이 제사 전날 머물렀던 재궁(齋宮), 제기와 제복을 보관하던 향대청, 제사용 물을 길어 올리던 우물. 종묘제례를 위한 별도의 재정과 토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종친들이 지금도 제례(祭禮)를 이어간다는 설명을 들으며, 종묘는 단지 옛 제사터가 아니라 왕조를 유지하던 하나의 체계로 다가왔다.
그런데도 돌마당을 걷는 내내, 마음 한켠은 조금 불편했다. '여기에는 일반 백성의 자리는 없구나.' 조선의 수도 한양은 북쪽의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 언덕에는 사직(社稷)단을 두어 이른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공간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빚에 쫓겨 논밭을 오가던 농부, 장터에서 하루 벌어 하루를 살던 장인들의 자리는 없었다. 통치는 백성을 위한 것이라 말했지만, 이 돌마당 안으로는 그들의 발걸음이 닿을 수 없었다.
오늘의 시선으로 종묘를 바라본다면, 왕의 길보다 종묘 담벼락을 따라 국밥을 팔던 노파의 손을 먼저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제삿날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굶주린 아이들을 뒤에 두고 나온 머슴의 마음을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왕조의 심장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 뒤편, 겨울 논두렁을 견디던 이름 없는 농부들의 얼굴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라고. 종묘는 분명 왕조의 심장이었지만, 민중에게는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다가갈 수 없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 거리감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교수 신부님은 자주 말씀하셨다. "조선 유교의 핵심은 효입니다. 그런데 그 효는 부모에게 드리는 사적인 효를 넘어, 임금에게 바치는 충성으로 이어집니다." 종묘는 그 효와 충이 만나는 장소였다. 전란과 기근, 전염병 속에서도 제사는 멈추지 않았다. 위패는 자리를 지켰지만, 이름 없는 삶들은 수없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을 것이다. 효와 충이 단단히 묶일수록, 그 틈에 있던 백성들의 얼굴은 더 흐릿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종묘는 내게 왕의 위엄이 아니라, '기억의 집요함'으로 다가왔다. 이 넓은 터, 정교한 절차와 건물들은 결국 "죽은 자를 잊지 말자"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만, 그 기억이 백성들의 삶의 향상과는 닿지 못한 채, 과거만을 향해 굳어 있다면, 오늘의 우리에게는 반쪽짜리 기억일지도 모른다.
대구로 돌아오는 버스 안, 창밖으로 밀려나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종묘의 세 돌길이 떠올랐다. 신의 길, 왕의 길, 세자(신하)의 길. 그 어디에도 '백성의 길'이라는 이름의 돌길은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서울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길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출퇴근 시간 지하철, 쇼핑몰, 오피스 빌딩, 카페, 물류창고... 그 중심에는 효율과 속도, 매출과 성장 그래프가 있다. 사람들은 그 그래프에 맞춰 시간을 쪼개고, 노동을 배치하며, 잠을 줄인다. 종묘의 신주(神主)를 모시던 건물 대신, 우리는 서버실과 데이터 센터를 세우고 AI를 앞세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 곡선이 이제 우리 시대의 신주처럼 느껴진다. 그 앞에 매일 출근 체크를 하고, 보고서를 올리며, 스스로를 탓하는 절을 올리는 건 아닐까.
나도 다르지 않다. 버스 안에서 휴대폰을 열어 사진을 정리하고, 다음 주 일정을 확인했다. 종묘에서 왕이 무릎 꿇던 자리를 보고 온 사람치고는 너무 빨리 현실로 돌아왔다. 알림을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살짝 저렸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절하며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개인의 반성이 아니다. 서울 사람들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일자리에 매달리고, 언제 내 집을 가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구조 아래에서, 노후의 삶이 불안한 세대들이 서로 뒤엉킨 채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러한 구조적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그래프와 목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프가 꺾이면, 나도 함께 꺾일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종묘 마당을 걸으며, 다시 한번 조용히 되묻는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를 기억하며 살아갈 것인가.“
6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킨 종묘는 이제 우리에게 조용히 묻고 있는 듯하다. 당신은 누구의 이름을 품고, 어떤 세상을 그리며, 오늘도 어디를 향해 마음을 가다듬고 있느냐고.
그 질문에 아직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 온다면,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려 한다. 내가 드리는 이 존경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그 얼굴을 나는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기억은, 단지 과거를 기리는 예가 아니라, 지금 여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안아주는 예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그렇게 마음속에 다시 하나의 길을 그려본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누구의 이름도 잊히지 않는 길로. 멀리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는 길로. 종묘의 고요한 돌마당에서 시작된 이 길이, 언젠가 우리 모두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종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유적으로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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