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약통을 열어 약을 꺼내고, 물 한 컵을 마신다. 창밖을 바라보면 예전처럼 출근길에 서둘러 나가는 사람들 대신, 조금 여유로운 속도로 움직이는 이웃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정표는 한참 비어 있는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정말 축복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통계를 보면 현실은 냉정하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 고독사, 치매 유병률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숫자들은 노년을 위험과 결핍의 시간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통계는 또 다른 사실도 말해 준다. 축복된 노후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가만히 두면 더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 시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태도로 맞이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내면의 목소리다. 우리는 오랫동안 “조금만 더 참자”, “아직 부족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억누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노년은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자신의 책임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남과 비교하느라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오랜 습관을 멈추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만 조용히 마주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며 "여보, 나는 무엇 때문에 나 자신을 작게 만들었을까? 오늘 고마웠던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함께 나누는 대화는, 마음의 방향을 조금씩 바꿔 놓는다.
감사는 그런 변화의 첫걸음이 된다.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오늘도 혼자서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뿐했다”, “내 손으로 따뜻한 밥을 지었다”, “오랜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는 소소한 사실들이 하루를 지탱한다. 아침에는 오늘 기대되는 일 세 가지, 낮에는 고마운 것 두세 가지, 저녁에는 감사했던 사람이나 장면을 떠올리며 배우자와 나누는 대화는, 우리 삶이 이미 여러 겹의 축복 안에 있었음을 서서히 깨닫게 한다. 축복된 노후란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고마움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를 다시 묻는 일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스며들지만, 그 외로움의 많은 부분은 방치에서 비롯된다. "왜 아무도 연락하지 않을까"를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누구를 생각하고 있었나"를 돌아보는 쪽이 관계의 흐름을 부드럽게 만든다. “오늘은 ○○한테 안부 전화 한 통 넣을까?” 하는 작은 생각이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 된다. 마음속에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고 싶은 사람, 혹은 마음이 무거울 때 조용히 기대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세대 간의 대화도 중요한 연결이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와만 어울리다 보면 생각은 쉽게 굳어 버릴 수 있다. 평생교육, 동호회, 봉사활동 같은 곳에서 다양한 연령대와 어울리는 시간을 갖다 보면,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의 말투와 감정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거리감은 호기심으로 바뀌게 된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뿐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감각은 노년의 관계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셋째로, 몸과 일상의 구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 몸은 노년의 가장 정직한 기록자이자, 축복을 담아낼 그릇이다. 이제는 무리보다는 꾸준함이, 속도보다는 리듬이 중요하다. 하루 30분 걷기, 가벼운 스트레칭, 계단 몇 층 오르내리기 같은 단순한 반복이 결국 몸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여기에 하루를 스스로 설계하는 습관을 더하면 좋다. 아침엔 “여보, 오늘 우리 뭐 해볼까?”라고 묻고, 낮엔 함께하는 활동을 하나쯤 계획하고, 저녁엔 오늘의 마음을 한 줄로 정리해 본다. 이 루틴은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는 삶에서, 시간을 의도적으로 살아내는 삶으로 방향을 바꿔 놓는다.
넷째로, 축복된 노후를 살아가는 이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역할과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반드시 돈이 되지 않아도 좋다. 살아온 이야기를 조용히 정리해 보거나, 손주를 돌보거나, 작은 텃밭을 가꾸거나,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일 모두가 소중한 사명이다. “여보, 우리 삶을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로 남기면 좋을까?”, “무엇을 통해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걸까?”라는 물음을 함께 나눠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 삶의 의미를 함께 써내려 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진심으로 돌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물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루틴을 만들고 인간관계를 돌보려 해도, 제도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은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연금, 의료, 주거, 돌봄은 최소한의 사회적 약속이어야 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이웃 공동체는 “문만 열고 나가면 반겨 주는 곳”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사회는 개인이 사유하며 살아가려는 노력을 뒷받침하는 단단한 울타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마지막 문 하나는 대신 열어줄 수 없다. 그 문은 언제나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스스로 밀어 열어야 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조용히 마주 보는 일, 서로에게 먼저 안부를 건네는 일, 30분 정도 함께 걸으며 서로의 마음을 들어주는 일, 살아온 삶의 단편을 한 줄씩 적어 보는 일... 그렇게 작고 조용한 실천들이 이어질 때, 축복된 노후는 점점 더 가까운 현실이 된다.
언젠가 먼 훗날, 우리가 조용히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쉽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우리는 하루하루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았다. 작지만 분명하게, 축복의 방향으로 함께 걸어왔다"고. 그 고백을 담담히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의 노년은 이미 깊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