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트북을 켜다가, 문득 책장 한편에 잠들어 있는 오래된 졸업앨범을 꺼내어 펼쳐보곤 한다. 시간의 먼지가 내려앉은 흑백 사진 한 장. 그 속엔 여섯 해를 함께한 삼분초등학교의 동기들, 총 56명의 얼굴이 소박한 풍경처럼 담겨 있다.
그 가운데 나는 오른쪽 맨 앞줄,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앉아 있다. 어쩌면 말보다 더 많은 마음을 담아낸 그 표정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는, 5학년 담임이셨던 신대열 선생님이다. 막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밀성초등학교를 거쳐 부임하신 젊은 스승. 나이로는 스무 살 언저리, 아직은 청춘의 숨결이 채 가시지 않은 나이였지만, 선생님의 눈빛엔 어느 노(老) 교사보다도 깊은 열정이 있었다.
신대열 선생님은 교과서만 펼치신 분이 아니었다. 제자의 삶까지 껴안고자 하셨다. 반 아이들 60여 명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정형편을 살피시고, 들판에서 일하던 부모님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리기도 하셨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품겠다’는 그분의 다짐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빛났다.
그 따뜻한 품은, 내게도 커다란 용기와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지금의 내가 삶의 목표를 품고 교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 선생님의 격려 덕분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깊은 애정을 쏟아주시던 선생님은, 6학년이 막 시작된 3월 말,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고향 봉양으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다. 마치 봄볕처럼 따스하던 스승이 갑자기 떠나셨을 때의 허전함은, 어린 마음에도 크게 남아 있다.
그 무렵 초등학교에서 6학년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아이들의 성적은 곧 학교의 명예였다. 그만큼 6학년 담임은 누구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그 자리를, 갑작스레 뒤늦게 맡게 되신 분이 바로 김주습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도덕’이라는 마을에서 매일 아침 8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달려 학교에 오셨다. 어둑한 새벽녘,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차가운 바람을 가르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6학년을 맡으신 뒤로는 종종 학교 숙직실에서 숙식을 하셨다. 여름이면 땀으로 젖고, 겨울이면 손끝이 얼어붙는 날씨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말없이 헌신하고, 묵묵히 아이들 곁을 지키셨다.
교실 안에서는 엄격하셨지만, 그 속엔 따스한 사랑이 늘 숨어 있었다. 친구와 다툰 날엔 조용히 양쪽을 불러 화해를 시키셨고, 시험을 망쳐 울던 아이의 등을 토닥이시던 손길엔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시절 반장을 맡고 있었다. 선생님은 종종 내게 말씀하셨다. “책임감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 말씀은 마치 오래된 등불처럼, 내 인생을 비추는 지침이 되었다.
사진 속 56명의 친구들 중, 지금은 고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내 기억 속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새마을체조로 하루를 열던 아침, 난로 위에서 도시락을 데우며 웃음꽃 피우던 점심시간, 그리고 “차렷! 선생님께 경례!” 소리에 맞춰 하나 되어 움직이던, 그 생기 넘치던 시간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먼지가 이는 시골길 위 자전거 바퀴 자국과 함께, 김주습 선생님의 굳건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저 멀리서, 청춘의 열정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쏟아주시던 신대열 선생님의 따스한 눈빛이 아련히 스친다.
흑백 사진 속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앉아 있다. 말은 없지만, 그 속엔 웃음과 눈물, 사랑과 그리움이 차분히 담겨 있다. 그 시절은 지나갔지만, 그 그림자는 지금도 나의 삶을 다정하게 감싸 안아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