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멈춰 선 날이 있었습니다. 18년 전, 위암 수술을 마치고 병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던 그때. 복도 넘어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군가는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서고, 누군가는 매점에서 무언가를 사 오고, 누군가는 병실 사이를 웃으며 지나갔지요. 그 평범한 풍경이, 그날따라 유난히 멀게만 다가왔습니다. 걷는 일, 밥을 먹는 일, 잠들고 깨어나는 일이 그토록 귀한 것임을, 저는 그제야 처음 알았습니다. 물 한 잔, 죽 한 숟갈이 가슴을 적시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매일 반려견 ‘사랑이’를 데리고 웅산(熊山) 자락을 오릅니다. 해가 뜨기 전, 까치 울음이 퍼지고 산어귀에서 꼬끼오하는 닭 울음이 하루를 엽니다. 숨이 차오를수록 살아 있음이 실감 납니다. 그때 창가에서 바라보던 풍경, 이제는 제가 그 안을 걸으며 마주합니다.
요즘엔 아내와 함께 가끔 ‘진해 중앙시장’에 갑니다. 생선가게 앞에서 파닥이는 고등어를 보고, 쑥갓과 상추를 손끝으로 살펴봅니다. 시장 끝, 오래된 찻집 ‘부엉이’에 앉아 단팥죽을 나누고 따뜻한 보이차를 마십니다. 말없이 마주 앉은 시간, 아내의 눈빛에 우리 지난 세월이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그 단팥죽의 단맛이 이렇게도 깊고 따뜻할 줄은, 예전엔 몰랐습니다.
프랜차이즈 카페보다 낡은 찻집이 좋습니다. 빠른 유행보다 익숙한 차향이 편안합니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처럼 제 삶도 천천히, 다시 데워지고 있습니다. 조용히 흐르던 시간이 제게 말을 건넵니다. "이만하면 잘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어도 괜찮아요."
느림은 멈춤이 아니었습니다. 더 깊이 보고, 더 오래 머무는 시간. 감사함이 스며드는 속도였습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하루가, 저에겐 기적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보통의 하루’를 지금 저는 천천히, 조용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당신께 조용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하루는, 얼마나 천천히 흐르고 있나요?” 빠름이 익숙한 세상에서, 느림은 잊고 지낸 것들을 되살리는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