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더링, 버티기_ 물린다면 존버

벽, 돌, 길 6

by 혜투

볼더링장의 풍경을 떠올려볼까. 쉬운 문제 몇 개로 몸풀기를 끝낸 뒤 약간의 도전을 해보기로 한다.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고, 경사는 심하지 않으면서, 너무 단순하진 않고, 잘 잡힐 것 같은 홀드로 구성된 마음에 드는 문제를 발견한다. 홀드를 노려보며 벽 앞에 서 있으면 크루원이 다가온다. “뭐 하시려고요?” “저기 검정 빨강이요.” 검은색 홀드, 빨간색 난이도를 뜻한다. “같이 해봐요.” “좋습니다.” 이젠 둘이 나란히 서서 홀드를 노려본다. 잠깐 루트파인딩을 하다 서로 먼저 붙으라며 양보한다. 첫 번째로 시범을 보이는 그림이 부담스러워 미루다가 슬며시 나서본다. 약간 긴장된 숨을 내쉬며 매트를 밟고 올라선다. “파이팅!” “가자~” 어느새 모여든 크루원들이 한 마디씩 던진다. 설렘과 막막함을 느끼며 손을 두어 번 털고 스타트 홀드를 잡는다.

차분히 오르는 구간을 지나면서 “나이스” 같은 추임새가 귀를 스치고,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실제론 1분도 흐르지 않았다. 벌써 부들거리는 이 팔로는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다운 홀드로 몸을 돌릴라 치면 뒤에선 버티라고 호통을 친다. 할 수 없이 튀어나오는 비명을 누르며 마침내 탑 홀드를 찍는 순간, 뿌듯함이 단번에 밀려든다. 남은 힘이 없어 냅다 뛰어내리자 지상의 동료들이 가뿐 숨을 몰아쉬는 나를 웃으며 반겨준다. 멋진 완등 사진을 남겨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털썩 주저앉으면 오늘의 빨강 하나 완료. 이제 다음 사람이 같은 문제 푸는 걸 지켜보면 된다.


사실 이런 식으로 힘겹게 한 번의 시도만에 해내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절반도 못 가 비효율적인 동작들 때문에 떨어지길 반복하다가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성공한다. 조금씩 올라가며 다른 구간에서 떨어지면 그래도 나아지는 중이라고 위안 삼겠지만, 매번 같은 구간에서 닿지 않거나 힘이 달린다면 지금 실력으론 안 되는 문제니까 그만두는 게 현명하다. 그럼에도 끝까지 붙드는 끈질긴 집념의 소유자들도 있다. 대체로 클라이밍을 꾸준히 하는 이들은 그런 집착력, 문제 해결 능력이 좋은 편이다. 나도 그런 문제를 만나면 오늘의 운명으로 여긴다. ‘물렸다’고 표현하는데, 다른 걸 풀다가도 자꾸 눈에 밟히고 이대로 집에 가긴 억울해서 또 달려든다. 어디가 잘못된 줄도 알고 진짜 조금만, 딱 몇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미묘한 아쉬움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암장을 몇 바퀴 돌아봐도 지박령처럼 그 앞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갈수록 체력은 깎이고 멘털은 흔들리고 응원하던 친구도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비우면 포기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버티다 실패한 경험을 여러 번 거치며 깨달았다. 애초에 문제를 잘 고르자. 내 노력을 삼켜버릴 블랙홀 같은 매력이 보인다면 눈을 피하자. 비겁하지 않다.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이니까. 하지만 매달리던 문제를 결국 해결했을 때 터지는 짜릿한 도파민은 잊기 힘들다. 내가 아니라 남이 그렇게 성공하는 모습을 목격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드물게 의기양양한 순간을 두고두고 회상하며 다시 ‘존버’할 에너지를 비축한다.


무엇보다 버티기가 가장 중요한 건 벽에 붙은 상황에서다. 내가 지금 이걸 잡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아야 한다. 과부하에 걸리거나 피로가 누적된 몸은 매트 아래서 잠시 쉰다고 회복되지 않는다. 욕심에 비례해 버티는 힘도 생긴 다지만 도파민에 가려진 고통은 분명 후폭풍을 몰고 온다. 한계 부근에서 나를 성장시키는 한 걸음일지, 몇 주 쉬게 만들 헛발질일지 모를 그 선을 어떻게 지킬까. 자신을 아는 일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스스로 들여다보는 시선을 오래 피해왔던 나는, 더 갈 수 있었는데 지레 겁을 먹고 내려왔다는 의심이 자꾸만 들었다. 그러다가 오래 버티려면 숨을 잘 쉬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예전에 수영을 배우면서도 고개를 내밀어 숨 쉬는 법을 끝내 익히지 못했다. 벽에서도 물에서와 같았다. 그만두길 결심한 순간마다 너무 간절한 나머지 호흡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버터야 하는 잠시 동안은 생각과 판단을 멈추고 오직 ‘숨쉬기’에 집중하자. 그리고 한 단계 나아가면 멈추고, 크게 숨 쉰 다음 또 움직이자. 이제 내게 버티는 일은 기를 쓰고 고민하는 모습보다는 조금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편에 가까워졌다. 많이 조급해지지 말자 다짐한다. 겨우 몸무게 하나 견디는 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그러니 얼마나 단순하냐고 스스로를 안심시켜 본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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