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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사이코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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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일 Oct 16. 2023

사이코(2)

사이코의 일기

너는 누구보다 불행에 젖은 사람이었고, 너의 불행이 마르기 시작한 건 나를 만나고부터였다고 확신해. 볕도 들지 않던 지하 방에서, 가난에 찌든 허물을 벗고, 손은 배꼽 위로, 흐릿해진 눈동자는 천장으로, 나를 좋아하는 너를, 둘 뿐인 공간을, 무한한 궤도에 올라 지구를 맴도는 위성처럼, 광활한 우주에 버려진 채 서로를 의지하며 견뎠던 날을 기억해 봐. 

목구멍을 타고 흐르던 맥주가 타액이길 바랐고, 힘껏 움켜쥔 잔이 육체이길 바랐고, 입술에 맺힌 방울이 영혼이길 바랐어. 너는 나를, 나와 함께한 시간을, 몸을 뒤섞던 순간을 미치도록 각인하고 싶어 했지. 

나도 그랬어. 

너를 보며 사랑을 떠올려. 고이 간직해 왔던 도화지를 꺼내. 붓을 들어. 팔레트에 붉은색 물감을 짜. 신선하고 붉은 물감을. 물감을 묻히고 너의 이마에 살짝 붓을 갖다 대. 간지럽다며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어. 너의 가슴이 힘껏 부풀었다가 제자리를 찾아. 붓질을 시작해. 아껴 먹는 아이스크림처럼 조금씩, 천천히. 

이마에서 턱으로. 턱에서 빗장뼈로. 빗장뼈에서 배꼽으로. 피부에 돋아난 작은 돌기와 움찔거리는 근육들이 사랑스러워. 달아오른 체온이 내가 쥔 붓을 녹여. 눌어붙은 털이 몸을 반으로 가르면 그 안에 숨은 우리가 보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발가벗은 사랑이. 

사랑을 알아본 건 나였는데, 안아준 건 나였는데. 시궁창 같았던 너를 받아준 건 나였는데, 네가 든 비수가 살갗을 뚫고 핏줄을 찌를 때마다 견디고, 견딘 건 나였는데. 네 몸을 물들인 건 나였는데. 네 몸에 흐르는 건 내 물감인데. 나를 버리고, 속이고, 기만했잖아. 비참했어. 언제부턴가 너의 눈동자 안에 내가 없더라. 그 안에 다른 누군가가 담길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미치도록 화가 났어. 

너도 알고 있었잖아. 식당 사장 말이야. 종일 네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었지. 높은 찬장에 접시를 올리는 너를, 까치발을 든 발목을, 힘주어 올라간 엉덩이를, 쑥 들어간 허리를, 만져주길 기다리는 가슴을. 공인중개사도 마찬가지야. 언덕길을 오르는 너를 지켜보던 눈빛. 끈적하고 음습한 시선이 네 허벅지를 타고 몸의 구석구석을 탐색해. 간사한 혀가 네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 너는 피하지 않았어. 알면서도 받아줬지. 

그럴 때면 나는 너를 참고, 참고 또 참고. 눈을 감고, 감고, 또 감고. 귀를 닫고, 닫고, 또 닫고. 물속으로 나를 파묻어 버려. 네가 보인 후회, 불안, 두려움, 자책. 그 자책이 나를 눈뜨게 해.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잖아.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위선과 가식을 잘 구분해야 한다고. 

내가 원한 건 그뿐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너의 눈동자에 다른 사람이 담겼더라. 너를 부르는 목소리도, 노골적인 시선도, 그득하게 담긴 총기와 생기와 애정도, 몸을 스치는 손끝도, 가까워지는 발걸음도 모두 내 것이었잖아. 썩어들어가는 나의 마음에 침을 뱉고, 의심을 남기고, 거짓을 새기고, 괴롭게 만들었던 사람은 너야. 

그래서 붓을 들었지. 네가 알았으면 했어. 도화지에 벌건 눈을, 구부러진 코를, 벌어진 입술을 그려. 너의 가슴에, 허리에, 사타구니에, 무릎에, 정강이에, 발등에. 곳곳에 붓을 칠해. 네가 문턱을 넘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네 몸에서 흐른 물감이 바닥을 적셔. 흥건한 물감이 나를 붉게 물들여. 

다른 이의 흔적을 지워. 당혹, 창피, 치욕 그따위 것들을 넘어선 불안, 동정, 연민 그리고 애정까지 가라앉아. 네가 비로소 깨달아. 나를 사랑했음을. 너를 가둬주기를. 너만 바라보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꽉 안아, 사랑한다며 귓가에 속삭이기를. 내 안으로 삼켜주길 원해. 있잖아. 바퀴벌레는 죽는 순간에도 알을 낳아 번식한다고 하더라. 

아무리 죽이려고 혈안이어도 바퀴벌레는 사라지지 않아. 내 사랑이 그래. 남들은 더럽고 비열한 욕정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위대하고 치열한 감정일 뿐이었어. 네가 죽어도 내 사랑만은 어딘가에 남아서 알을 낳을 거야. 계속해서 낳고, 낳고, 또 낳고. 

호가 그러더라. 일전에는 내가 너의 살로, 뼈로, 세포로, 체액으로 배를 채웠는데 이제는 네가 사라져서 나 자신까지 갉아먹고 있다고. 내가 널 좀먹었다고? 그럴 리가.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절망에서 시작되는 거잖아. 호는 절망을 몰라. 너의 몸에 그리는 붓질을 구원이 아닌 수렁으로 생각해. 

소라야, 너에게 나는 구원이었고 사랑이었어. 그래서 내가 널 선택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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