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둘.
소라야, 사랑을 알아본 건 나였는데, 안아준 건 나였는데. 시궁창 같았던 너의 인생을 받아준 건 나였는데. 너는 나를 버리고, 속이고, 기만했잖아. 비참했어. 언제부턴가 너의 눈동자 안에 내가 없더라. 너도 알고 있었잖아. 식당 사장 말이야. 종일 네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었지. 높은 찬장에 접시를 올리는 너를, 까치발을 든 발목을, 힘주어 올라간 엉덩이를, 쑥 들어간 허리를, 만져주길 기다리는 가슴을.
공인중개사도 마찬가지야. 언덕길을 오르는 너를 지켜보던 눈빛. 끈적하고 음습한 시선이 네 허벅지를 타고 몸의 구석구석을 탐색해. 간사한 혀가 네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 그럴 때면 나는 너를 참고, 참고 또 참고. 눈을 감고, 감고, 또 감고. 귀를 닫고, 닫고, 또 닫고. 온몸의 감각을 물속으로 파묻어 버려. 네가 보인 후회, 불안, 두려움, 자책. 그 자책이 나를 눈 뜨게 해.
분명히 말했잖아.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위선과 가식을 잘 구분해야 한다고. 너무 가까워지지도 말고, 멀지도 않은 적정선에 서서 도망치기만 하라고 말이야. 내가 원한 건 그뿐이었는데. 비가 쏟아지는 여름날에 수풀에서 기어 나온 달팽이를 밟고 지나치는 사람처럼, 자전거 바퀴 따위로 취급하며, 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나를 짓이겼지.
괴로웠어. 네 몸을 물들인 건 나였잖아. 네 몸에 흐르는 건 내 물감이잖아. 그래서 붓을 들었지. 네가 깨닫기를 바랐거든. 도화지에 벌건 눈을, 구부러진 코를, 벌어진 입술을 그려. 너의 가슴에, 허리에, 사타구니에, 무릎에, 정강이에, 발등에. 곳곳에 물감을 칠해. 네 몸에서 흐른 물감이 바닥을 적셔. 흥건한 물감에 나의 발가락을 붉게 물들여.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바닥을 훑지. 오목하게 모인 털끝에서 떨어지는 물감이 방울, 방울 모여 흐르는 강이 될 때까지. 네가 문턱을 넘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당혹, 창피, 치욕 그따위 것들을 넘어선 불안, 동정, 연민 그리고 애정까지 네 몸 곳곳에 새겨. 그리고 네가 비로소 깨달아. 나를 사랑했음을. 너를 가둬주기를. 너만 바라보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꽉 안아, 사랑한다며 귓가에 속삭이기를. 내 안으로 삼켜주기를.
그리하여 네가 잊었던 사랑을 다시 깨닫기를. 네가 처음으로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나는 차라리 흙이 되고 싶었어. 네 발길이 닿는 곳 어디라도 내가 있기를, 발가락 사이사이에 낀 모래알처럼 너에게 거슬리기를 바랐어. 내 바람을 듣던 넌 도망치지 않고 나를 따라왔지. 그때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죽이고 싶었을까, 아니면 네가 죽고 싶었을까.
있잖아. 바퀴벌레는 죽는 순간에도 알을 낳아 번식한다고 하잖아. 알을 낳고, 알을 낳고, 알을 낳지. 내 사랑이 그래. 남들은 더럽고 비열한 욕정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위대하고 치열한 감정일 뿐이었어. 네가 죽어도 내 사랑만은 어딘가에 남아서 알을 낳을 거야. 계속해서 낳고, 낳고, 또 낳고.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절망에서 시작되는 거잖아. 내가 붓질한 물감에 흠뻑 젖었을 때, 비로소 구원이 시작된다는 걸 알잖아.
소라야, 너에게 나는 구원이었고 사랑이었어. 그래서 내가 널 선택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