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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사이코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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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일 Oct 16. 2023

사이코(9)

호의 이야기

우리 관계의 일부분이 사라졌고, 관계가 상실됐다는 사실은 뭐랄까, 슬펐다. 커다란 공허함이 찾아왔다. 그래서였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던 여자애와 사귄 건. 무참히 끊어진 실을 누구에게라도 연결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소라도 더는 내게 미안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억지로 웃고, 억지로 손을 잡고, 억지로 먹고, 억지로 연락하고, 억지로 함께했다. 

거의 강박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한 계절이 지날 때까지 소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다시 가까워진 건, 내가 솔직해지고 난 후부터였다. 사실은 상처받기 싫었다. 소라에게 마음이 처참히 터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창피하고 아팠다. 소라를 향한 미움, 아무나 사귀자고 먹은 마음, 먼저 다른 사람을 곁에 뒀다는 안도, 네가 아니라도 괜찮다는 치기, 치기를 핑계로 한 무시가 한꺼번에 나를 비웃었다. 

궁금했다. 소라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의심이 들었다. 나에게 보였던 눈빛이 한낱 친절에 불과했는지. 물어보고 싶었고 그 아이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돌아보고 싶었다. 소라를 불렀다. 이별을 고백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함께 버스를 탔고, 다른 좌석에 앉았고, 가는 내내 소라의 좁은 어깨를 지켜봤다.

언덕을 넘은 버스가 사거리를 지나쳤다. 그 아이가 벨을 눌렀다. 거스러미를 억지로 뜯어내느라 만신창이가 된 손이 신경 쓰였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소라가 길 건너를 가리켰다. 길게 늘어선 줄이 역 출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근처 대학교의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이었다. 길을 건넜다. 자연스럽게 마지막 사람 뒤로 줄을 섰다. 

여기에 있으면 안심이 돼. 

소라의 말이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버스에 탔다. 우리도 앞으로 걸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줄이 짧아졌다. 어딘가 마음이 뒤틀렸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싫은 거야? 라며 물었다. 거절당해도 지난번만큼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침묵도 견딜 만했다. 이렇게 무뎌지고, 무뎌지다 보면 열 번도 고백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또다시 정류장으로 버스가 들어왔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뒷사람이 우리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어깨 앞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갔다. 버스가 출발하고 내 뒤에 또 다른 사람이 섰을 때, 대열에서 이탈한 소라가 뛰었다. 점점 멀어져 갔다. 쫓아갔다. 가을바람이 시원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도, 흐르는 땀도, 핑 도는 눈가도, 들썩이는 등도, 가쁜 숨을 내쉬는 콧구멍도, 땀방울이 떨어지는 머리카락도, 따뜻하게 웃는 소라도 새로워 보였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딱히 웃긴 일도 아니었는데 재밌었다. 길 한복판에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 내어 웃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웠다. 그 아이가 호야, 하고 나를 불렀다. 

네가 언제까지 나를 좋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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