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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사이코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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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일 Oct 16. 2023

사이코(8)

호의 이야기

소라와 만난 건 열아홉, 봄이었다. 

그 무렵 나는 막연히 돈을 벌고 싶었다. 유명한 한식당을 운영하시던 부모님 덕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었으나 남들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부유한 집의 자식이라는 친구들의 시선도 싫었다. 겉으로는 부러워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시기하고 이용하려고 했다. 늘 바쁜 부모님도, 방황하는 시간도, 꿈도 그 애들의 시각에서는 돈이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삶이 재미가 없어서, 모든 일이 무의미했기에,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부모님의 아들이 아닌, 그냥 나로 살면 조금은 의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예식장에 출근해서 접시를 나르고, 음식을 치우는 일이 생각보다 고됐다. 

사람들의 성화에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음료수와 술을 주문하는 테이블을 미처 기억하지 못해 순서가 뒤죽박죽 엉켰다. 급하게 산 싸구려 구두를 신고 종일 걷다 보니 배가 고팠다. 접시를 치우는데 주위가 고요하게 느껴졌다. 길게 늘어진 테이블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침 접시 위에 꿀떡 몇 개가 굴러다녔다. 

분홍색 하나, 쑥색 두 개. 

디저트만 담아 왔는지 접시는 깨끗했고 금방 씹어 삼킬 수도 있을 듯했다. 아무도 모르게 먹어 치우고 싶었다. 침이 고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각자 제 일로 바빴다. 고개를 숙였다. 크게 벌린 입에 꿀떡을 넣었다. 하나로 부족해 하나를 더 넣고 씹었다. 최대한 느릿하게 어금니를 맞물리며 테이블을 치우는 척했다. 

거의 다 씹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정면에 있던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소라였다. 소라의 입이 우물거렸다. 입술 옆에 갈색 양념이 묻은 걸 보아하니 갈비찜 같았다. 소라가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았다. 우리는 동시에 딴 데로 시선을 옮겼다. 그날 이후로 보이지 않던 소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녀분반으로 함께 수업을 듣지는 못했지만, 어딜 가나 소라가 보였다. 복도에서도, 계단에서도, 급식실에서도 심지어 소각장에도 그 아이와 마주쳤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고, 이름을 물었고, 휴대전화 번호를 저장했다. 소라는 웃기면서도 제가 얼마만큼 웃긴 지 몰랐다. 애들과 잘 어울려 다니고, 공부도 잘했고, 뭐든 맛있게 먹었다. 힘이 넘쳐나서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지 않고도 밤새 시험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아이 곁에 있으면 나까지 싱그러워졌다. 나는 소라의 이름이 좋았다. 김소라, 김소라, 김소라! 라고 부르다 보면 전신이 간질거렸다.

반대로 소라가 호야, 호야, 진 호! 라고 부르면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텅 비어 있던 속이 무언가로 가득 차서 벅차오르는 느낌.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웃었고, 때로는 토닥거렸다. 어느 날은 훅, 가까워지기도 했다. 

나는 모든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억지로 웃고, 억지로 먹고, 억지로 무언가를 했다. 그런 나에게 소라는 색이었다. 온통 무채색뿐이었던 세상을 소라로 물들이는 느낌. 소라와 있으면 싫어하는 일들도 괜찮았다. 이를테면 모래바람으로 더러워진 벤치에 앉아, 이미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쥐고, 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하다가, 떡볶이를 입에 욱여넣고 교실로 뛰어가는 일. 

아쉬웠다. 시간이 뭉텅이로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깊이 물들고 싶었다. 소라와 나는 성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걸어야 했다. 혹시나 내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릴까, 겁이 났다. 그래서 고백을 결심했다. 나의 고백에 소라는 놀라지 않았다. 씩 웃으며 조금 더 생각해보고, 라고 답했다. 

그러나 금방 돌아오리라는 답은 한참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감이 한풀 꺾였다. 나의 어설픈 고백이 소라에게 부담으로 다가갔을까. 한참을 뒤척이던 그 밤, 소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온 소라는 여느 때보다 예뻤다. 소라의 연락에 급하게 구겨 신은 운동화가 부끄러워진 순간이었다. 

미안해. 

연신 사과를 거듭하던 그 아이가 울었다. 우는 그 아이를 달래느라 내가 차인지도 모를 만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소라가 당연히 고백을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했다. 내가 좋아한 만큼 소라도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 고백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나는 소라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열 번 고백하면, 소라는 열 번 거절해야 했다. 

거절 의사를 표시할 때마다 그 아이가 짊어질 죄책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평소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아이였다. 본인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도 그랬다. 소라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하고, 사과했다. 소라의 사과가 나에게로 향했을 때. 후회했다. 나의 고백이 그 아이에게는 미안함으로 남은 걸까. 소라는 철저하게 나를 피해 다녔다. 어쩌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돌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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