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 이야기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땀에 눌어붙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샤워기를 틀었다. 시린 물줄기가 정수리를 적셨다. 살갗에 작은 돌기가 돋아나며 몸이 떨려왔다. 수도꼭지를 온수 방향으로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붉은 물감, 이라고 했다.
소라의 몸에 든 멍과 피는 물감으로, 몽둥이는 붓으로, 절규는 환희로 표현한 거다.
그 무렵, 나는 소라와 멀어지기로 작정했다. 영원히 자신을 잊어달라는 그 아이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나의 존재가 그 아이에게 고통으로 남는다면 사라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마도 윤수한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윤수한은 소라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소라와 내가 친구였을 때도, 연인이었을 때도, 헤어졌을 때도,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도, 소라가 아팠을 때도,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을 때도, 내가 보기 싫다며 물건을 집어 던졌을 때도, 살려달라며 애원했을 때도, 다시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을 때도, 병원비를 부탁했을 때도,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몸을 뒤틀었을 때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늘 윤수한이 있었다. 가끔 윤수한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죄책이 내 주변으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 나의 어리석음에 소라가 얼마만큼 상처받았는지 서슴없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윤수한이 나를 미워하고 증오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대신해 소라를 미워하고 증오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병상에 누운 소라의 얼굴은 파리했다. 그 아이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어린 나뭇가지만큼이나 얇은 손목을 잡았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쏟아낸 말이었다. 유난히도 좋아 보이는 컨디션에 기분이 좋았다. 의사의 권유로 바꿔본 약의 효과가 있다는 기대도 들었다.
그 밤, 까무룩 잠들었던 소라는 깨어나지 못했다. 윤수한은 사라졌다. 임종이 가까워졌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윤수한을 찾았다. 그러나 하루를 기다리고 이틀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소라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 힘없는 손짓이 나를 불렀다. 산소마스크에 입김이 묻었다가, 사라졌다. 입술이 달싹였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가는 숨이 점점 더 늘어지고 있었다.
흐리멍덩했던 소라의 눈동자에 어떤 빛이 스쳤다. 이불 아래로 손이 흘러내렸다. 손가락이 성한 데가 없었다. 손톱 주변으로 난, 벗겨지고 짓무른 상처가 그 아이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물고기도… 고통을 느낄까?”
그것이 소라의 마지막 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