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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사이코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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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일 Oct 16. 2023

사이코(10)

호의 이야기

소라의 물음을 곱씹었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가끔 힘든 날에는, 내가 한없이 모자란 인간이라고 느껴질 때면, 전화를 걸었다. 딱히 어떤 말이 오가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전화를 걸어놓고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소라가 먼저 잠든 날에는 새근새근한 그 아이의 숨소리가 응원이 되기도 했다. 

수능이 끝나고 소라는 가뿐히 최저 등급을 맞췄다. 나는 생각보다 저조한 성적에 실망했다. 나는 재수를, 소라는 등록금을 고민했다. 소라의 고민에는 해결책이 있었다. 나에게 돈이 있었다. 그러니 원한다면 등록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 아이가 화를 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억울했다. 나는 소라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저 응원하고 싶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앞서가는 소라를 내가 졸졸 뒤따랐다. 뒤축이 다 떨어진 단화를 신고 언덕을 오르는 그 아이의 등이 유독 작아 보였다.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섰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창피하다고 했다. 멀뚱히 나를 쳐다보는 소라에게 솔직히 말했다. 

사실은 부모님의 돈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전부라고 말이다. 소라는 나에게 재수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뭘 하고 싶으냐는 물음에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남들처럼, 튀지 않고, 평범히. 대학은 다니라는 소라의 말에 알겠다고 했다. 등록금은 각자가 해결하자는 말에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자. 

소라의 입에서 고백이 튀어나왔을 때, 다짐했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하겠노라고. 그러나 소라는 알고 있었다. 나의 마음이 변하리라고. 나와 소라의 스물은, 스물하나가, 스물둘이 서서히 변색 되고 흐려지리라는 것을. 

내가 마음을 끝까지 지켰더라면, 그 아이의 눈물을 지겨워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위한 배려를 알아차렸다면, 내 상처가 더 크다며 따지지 않았더라면, 비겁함을 삼키고 용기를 냈다면, 윤수한을 보고 있는 너의 눈을 가려줬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너는 여전히 맛없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습관처럼 웃고 있지 않았을까. 

스물셋 겨울, 나는 소라에게 지쳐가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숨도, 가끔 보이는 눈물도, 지친 표정도, 그냥이라는 대답도 지겨웠다. 소라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우울했다. 바쁜 소라를 기다리는 일도 더는 즐겁지 않았다. 어느 날은 화가 나기도 했다. 소라가 평범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그 아이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평범하게 살 수 없냐는 물음에 소라는 자신이 평범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뭔데?

창밖을 가리켰다. 교복을 입고 까르르 웃는 학생들, 멀끔하게 차려입고는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 생기 있는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여자, 운동복을 입고 러닝을 하는 남자.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다. 우울한 얼굴로, 늘어진 티를 입고, 종일 접시를 나르다가, 수업에 늦고, 약속에 늦고, 나를 잊고, 너를 잃는 게 아니라. 

소라가 입술을 닦았다.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등을 급히 감추며 일어서는 그 아이를 잡지 않았다. 소라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과 평범하게 살아. 말끝에 동기 이름을 덧붙였다. 화가 났다. 잔인한 말로 소라에게 상처 줬다는 사실보다 내 휴대전화를 몰래 봤다는 사실에. 우연히 봤다고 했다. 휴대전화가 아니라 동기와 밤거리를 걷는 나를. 

오해였다. 소라가 먼저 바쁘다고 했고, 동기들을 만났고, 술자리에서 시간을 보냈고,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봤고, 그곳에 그녀가 있었을 뿐이었다.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 아이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등을 돌린 그 아이의 어깨가 떨렸다. 외면했다. 한동안 창밖으로 지나치는 사람들만 쳐다봤을 뿐이었다. 

그게 우리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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