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입니다.
1. 계획
딸 세진이 태어난 후 백일하고도 한 달이 되던 토요일 밤. 겨우 아이를 재우고 맥주를 마시던 우리 부부는 삶을 재설계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데 합의했다. 경기도 부평의 17평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탈출해야 했고 강남까지 왕복 세 시간이 넘는 통근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시엄이(나는 시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물론 속으로만) 경매로 낙찰받은 연립주택의 대출금도 한참 남았는데 생활비도 보내야 했다. 그 생각을 하면 탄산음료 없이 삶을 달걀을 삼킨 것 같이 가슴이 꽉 막혔다. 하루이틀, 일년이년이 아니라 앞으로 수 십년 돌봐야 할 아이가 하나 더 생긴 것과 같았다. 친정에 한 푼도 못 보태는 것도 미안했지만 친정에선 괜찮다고 했다. 아버지의 퇴직금도 있고 엄마는 부업을 하고 있는데다 오빠들 둘이 챙기니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너는 여기 신경 쓰지 말고 시어른한테 잘 하라고. 그렇게 친정엄마는 나를 다독였지만 역시 손해보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시엄도 가만히 앉아 받아먹는 사람은 아니었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어떻게든 벌어 보겠다고 행정복지센터에서 박스를 접거나, 농공단지에서 깻잎 포장을 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부부가 (언론의 표현대로 하자면) 요즘 사람들 같지 않게 ‘그냥 쉴래요’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훈이 취직한 전자부품회사는 대기업에 속했고 나의 직장인 부동산 컨설팅 기업도 꽤 규모가 있었다. 우리 주변엔 언제나 재테크와 자기개발에 관한 책들이 널려 있었으며 유튜브를 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런 서로를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미래를 위한 다른 설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훈은 해외파견 사원에 자원했는데, 자리가 난 곳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였다. 해외 수당은 물론 치안이 워낙 안 좋은 곳이라 위험수당까지 나오는 나라이고, 현지 사원의 자식들에게 수학 과외도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이력을 잘 쌓으면 영국이나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세진을 국제학교(물론 회삿돈으로)에 넣을 수도 있었다. 미래를 위해 괜찮은 설계였다.
하지만 나의 상황은 좀 복잡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백 삼십일 동안 나는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아이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자거나 젖몸살에 울면서 돌덩이가 된 유방을 마사지하는 것 따위는 견딜 수 있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아이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시간 자체였다. 낮 시간, 세진이 잠들기만을 빌며 멍하니 아기의 초롱한 눈을 바라보거나 일주일에 한 두 번 오는 친정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하고 허망하기까지 했다. 무언가 인생의 소중한 것이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직장 복귀를 앞둔 엄마일수록 아이와 ‘끝내주게’ 놀아주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놀아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놀 방법은 많았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발달 놀이 top 10’, ‘아이를 위한 뇌과학 훈련 놀이’ ‘엄마표 전통 놀이’ ‘인지감성 발달 놀이’ 등등. 하지만 10분만 지나면 그런 놀이는 모두 인내심 테스트나 극기훈련이 되어 버리고 만다. 넘 작고 소중해, 무얼 해도 이쁜 우리 아기. 인터넷 속 이런 문구들에 아예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하루 종일 아기와 보내는 시간이 그리도 행복한가요, 하고. 화면 속 엄마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힘들지만 그래도 너무 예뻐요. 고생이라도 행복해요. 나는 그런 대답들을 흰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내가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러 괴로워졌다. 그래서 친정엄마가 오는 화요일, 구청에서 운영하는 무료 상담을 예약했다. 상담사는 나보다 열 댓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 여성으로, 아이를 둘 키운 후 상담사 자격증을 땄다고 말했다.
“강민주님께선 아무래도 아직 엄마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조금 덜 되신 것 같아요.”
상담사는 내가 그려놓은 그림에 형광펜 표시를 해가며 설명했다.
“그림을 보시면요, 아기를 의자에 앉혀서 맞은 편에 두셨어요. 손을 잡거나 안고 있지 않으시죠. 그리고 어머님은 스스로를 굉장히 크게 그리셨어요. 그건 자기 실현 욕구가 강하다는 뜻이예요.”
“그럼 어떡하죠.”
“엄마로서 재무장하셔야 해요. 나는 엄마다, 이걸 잊으시면 안 되요.”
그날 나는 그림을 둘둘 말아들고 집으로 오며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훈에게 내가 어떤 엄마인 것 같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만두고, 친정 엄마가 어떤 엄마였던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주변에서 먼저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 중 엄마가 된 사람들을 모두 떠올려 보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말은 역시 ‘힘들지만 너무 예쁘다’는 말이었고 나처럼 “예쁘긴 한데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한 정도랄까. 책을 몇 권 주문하기도 했다. “나는 내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 라거나 “모성의 신화를 파괴하라”같은 책들이었다. 책에서 가장 많이 발견한 단어는 ‘당당하라’였는데, 당당하자고 마음만 먹는다고 당당한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친정 엄마만 해도 너 직장 복귀 하면 세진이, 불쌍해서 어떡하냐는 말을 되풀이했고 젖말리는 약을 먹을 때는 온 식구가 나서서 반대했으니.
그런 면에서 시엄은 나와 정반대였다. 그이는 매일,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전화를 해서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오후 한 시에서 세 시 사이가 시엄이 전화하는 시간이었는데, 그 때쯤이 되면 나는 전화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시엄의 전화는 늘 똑같은 말로 시작되었다. “에미야, 엄마다.”
“우리 애기, 오늘은 뒤집기 했어?”
“먹는 건 잘 먹으어? 분유 말고 다른 거 먹어도 되는데?”
“아니, 벌써 잔댜? 영상 통화 한 번 헐라구 했는데.”
친정 엄마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자꾸 스스로를 엄마라 칭하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손녀에게 지극 정성인 시엄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빚더미에 올라 앉았을 때, 완전히 실의에 빠져 있던 시엄에겐 오랜만에 탄생한 새 생명은 남다른 의미였다. 갓 태어난 혈육의 신선한 생기가 사위어가는 늙은 몸을 깨운 것일까. 세진이 태어났을 때 병원에 찾아온 시엄이 홀린 듯한 목소리로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이쁘다니…하며 아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시엄의 태도는 나에게 다른 계획을 궁리하게끔 했다. 그래서 나는 오랜 시간 혼자서 앓은 끝에 정훈에게 계획을 털어 놓았다. 직장에 복귀하지 않고 대전에 내려가 시엄과 합친다는 엄청난 계획이었다. 전셋금을 빼서 배당주를 사거나 예금을 하여 한 푼이라도 더 벌고, 거의 두 집 살림이나 다름 없는 생활비를 줄일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안심하고 하루 종일 맡기며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감정평가사 시험에 매달릴 수 있다. 시험에 붙으면 고소득 가정으로 재탄생하여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딱 2,3년만 몸테크 하면서 고생하는 거야. 자기 돌아올 때쯤 서울로 올라오구.”
“시험, 자신 있어?”
“자신 있어.”
나는 일부러 강한 어조로 말했다.
“1차만 두 번 붙었잖아. 어머님이 세진이만 잘 봐주시면 틀림없이 될거야. 혹시 안 되도 직장 다시 잡고 공부하면 돼.”
한참 생각하다가 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만 하다고.
그로부터 정신 없이 바쁜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계획이 있으니 생활에 윤기가 돌았다. 나는 퇴직금과 실업수당을 세팅해 놓고 대전에 아는 사람들이 있는지, 대전의 고시학원은 어떤지 학원에서 모집하는 스터디는 괜찮은지 알아보았다. 서른 셋은 아직 공부가 가능하면서도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는 나이었다.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세진을 볼 때마다 전문직 엄마의 모습을 상상했다. 감정평가사라는 타이틀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임시직 교사만 전전하다 그만둔 친정엄마나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시엄,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전업주부 시누들은 꿈꾸지 못한 삶이었다. 세진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집안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여자의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