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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착한, 시어머니(2)

by 타이미르


2.이계(異界)


정훈이 아프리카로 떠나고 한 달 쯤 지난 후 나는 카시트에 세진을 단단히 동여매고 대전으로 향했다. 그날은 대전에선 보기 드물게 추운 11월이었다. 시엄은 몇 번이나 도착 시간을 묻는 전화를 하더니 결국 연립 입구에 나와 서성이고 있었다.

“아이구, 날이 왜 이 모냥이여. 세상에, 너는 참 간도 크다. 여기까지 어떻게 혼자 운전을 해 온댜.”

집 안은 난방을 하여 후덥지근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시엄의 절친 4인방이 이미 거실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애기 좀 봐, 얼마 만에 보는 애기여.”

“착하기도 허지. 요즘 시어머니 모시는 며느리가 어디 있댜?”

나는 자리에 앉아 자꾸 앞으로 밀려오는 먹거리들을 정중하게 밀어냈다. 점심을 먹고 왔다거나 다이어트 중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소화가 잘 안 된다거나 체한 기가 있다는 말을 하면 서랍 속에서 온갖 종류의 약들이 튀어나온다. 예전에 “저 이런 거 안 먹어요.”라는 말로 끈질긴 먹거리 공세를 차단한 적이 있는데 조금만 더 들이밀면 눈 딱 감고 다시 못된 며느리 신공이 나올 뻔 했다. 먹거리 공세의 주범은 익산댁이었다. 그이의 앞에는 찐고구마와 감자, 단호박 식혜가 그득했지만 특별한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약밥 재료가 가스불 위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익산댁은 음식 솜씨가 좋기로 유명했는데, 집에는 원래 쓰던 냉장고와 자식들이 새로 사준 대형 양문형 냉장고, 김치 냉장고까지 3대를 돌렸다. 음식을 쌓아 놓아야 안심이 된다던가. 그 옆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프라이드는 빨간 프라이드를 몰고 다녀 프라이드였고 가장 나이가 많은 아파트는 이 무리에서 유일하게 아파트를 분양받아 아파트였다. 시엄의 절친인 88슈퍼도 쌍팔년도에 슈퍼를 오픈해서 88슈퍼인데, 슈퍼는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내가 현관문 앞 방에 짐을 부리고 있는 동안 집안은 확연히 잔칫집 분위기가 되었다. 달고 짠 간장 졸이는 냄새가 속을 뒤집었지만, 앞으로 먹을 것 걱정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그 난장 가운데서 시엄은 나를 손짓해서 불러 앉히고 눈처럼 새하얀 천을 펄쳐 보였다.

“중앙시장에서 끊어 왔다. 으뗘?”

세진의 기저귓 감이었다. 나는 저절로 입을 떡 벌어졌다. 이걸 어떻게 쓰시려구요, 하자 시엄은 천 기저귀가 건강에도 좋고 돈도 덜 든다며 빨래와 삶기는 모두 내가 할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나는 혹시라도 이 새로운 노동이 내게 전가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입으로는 어머님, 친환경적이네요하고 추켜 세웠다. 시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에미 너 나랑 잠깐 어디 좀 다녀오자.”

날씨도 꾸물한데 어딜가나 했지만, 시엄은 오늘 꼭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이 있다며 집을 나섰다. 이웃들이 아이를 봐 주는 동안 외출도 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나는 시엄을 따라 나섰다. 차를 가지고 가자는 말에 시엄의 입은 귀에 걸렸다. 그이는 한 번도 승용차를 가진 적이 없어 내가 차를 태워 주는 것을 좋아했다.

“네비 쳐 봐. 대각사라고, 여기서 가차운데 있어.”

시엄의 목소리엔 생기가 넘쳤다. 대각사까지 가는 길은 미로같은 동네길을 빠져 나가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쪽으로 뻗어 있었다. 아파트 단지 정문 앞에는 ‘주민 외 놀이터/운동시설 이용 금지’라는 플랭카드가 붙어 있었다. 새아파트 단지에는 대형 정글짐이 있는 놀이터와 베드민턴장, 탁구대, 물놀이용 바닥 분수가 있었다. 특히 물놀이 시설이 여름 내내 동네 아이들에게 점령을 당해 분란이 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예 접근 금지가 된 모양이었다. 대각사는 그런 새 아파트 단지를 마주보고 있었다. 절이라곤 하지만 지붕만 기와를 올린 주택이었고 담벼락에는 새 단지와 어울리지 않는 지옥도며 신장(神將)의 그림이 가득했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아도 절 자리가 아파트 단지를 위한 상가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시행사에서 이 자리를 사려고 꽤나 애를 썼을 텐데, 협상이 잘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담벼락 한 구석에는 ‘우리 동네 흉물, 그만 나가!’라는 손글씨 팻말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시엄은 내가 주차하는 사이 그것을 떼 와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돈 좀 있다고 유세 떨기는. 더불어 살 줄 알아야지.”

대각사는 절인지 무당집인지 알 수가 없었다. 1층이 법당으로 쓰이고 있었는데 흔한 부처님 대신 팔이 여러 개인 관세음보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샛노란 금박을 입고 좌정해 있었다. 2층은 주지 스님과 그 아들이 사는 살림집이었다. 부인은 시내 아파트에 살고 두 부자가 절을 운영한다고 시엄은 귀뜸했다. 그리고 아들 스님, 즉 작은 스님이 내려오자 시엄은 일어나 큰 절을 올리며 내게 눈총을 쏘았다. 나도 얼떨결에 절을 했으나 너무나 젊은 스님에게 절을 하는 것이 떨떠름했다.

“우리 보살님, 아이 잘 키우시고 효도하시고요. 아, 시험도 잘 되시고.”

절을 받은 후 이어진 스님의 덕담은 준비된 맨트를 말하듯 스스럼 없었다. 꼭 인사드릴 사람이 이 젊은 스님이었다니. 게다가 동네방네에 이미 내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시엄은 나대신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말했다.

“얘가 참 착해요.”

그러고는 잠시 스님과 볼 일이 있다고 하여 나는 법당을 나와 차 안에서 시엄을 기다렸다. 그동안 이런데 다닌다는 말은 전혀 들은 기억이 없는데 왠일인가 하여 의아스러웠다. 게다가 착하다니. 하루에 착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들은 것은 철들고 처음이었다.

시엄은 한참만에 나왔다.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노란색 종이를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작은 스님한테 받아온 부적이라며, 지갑에 넣고 다니라 했다. 그리고 손에 든 비닐 봉지를 조심스럽게 열어 안에 든 것을 펼쳤다. 종이가 아닌, 삼베같이 생긴 천 위에 붉은 한자가 어지럽게 써 있었다. 크기가 내 몸통보다 더 컸다.

“이거 우리 애기 깔아줄라고 큰 스님헌테 특별히 부탁혀 받었다.”

“이게 뭔데요?”

나는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이게 부적이냐고 묻기도 전에 시엄이 대답했다. 올해 조심혀야 한단다. 3일 깔고 재우고, 걷어서 하루 쉬고 또 3일 깔고 재우고, 그렇게 세 번 반복하고 태우면 된댜.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당장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바퀴벌레나 쥐를 보았을 때같은 징그럽고 소름끼치는 느낌만 목덜미를 치고 지나갔다. 그날 밤, 나는 정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받은 부적 사진을 찍어 보내고 난생 처음 보는 대형 부적 이야기도 적어 보내며 불평을 늘어 놓았다. 곧 답이 왔다.

“엄마 원래 안 그랬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부쩍 대각사를 자주 다니더라고. 맘이 허해서 그러실테니 그러려니 하고 넘겨.”

그날은 보름이었지만 달빛은 구름 속에 가려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세진은 시엄과 함께 잠들었고 나는 오랜만에 혼자 편하게 잘 수 있었지만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가끔씩 안부차 내려올 때와는 달랐다. 수도권에서 140여킬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계(異界)에 진입한 것이다. 이전에 살았던 세상과 나란히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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