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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an 28. 2023

외출 나가기 전

생활관 책상에 앉아있으니 떠오르는 생각들

현재 시각 오후 3시, 외출 나가는 핑계로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소통과 공감을 빠졌다. 애초에 소통과 공감이라는 표현과 맞지 않게 대부분 일방적인 통보가 대부분이고, 또 군인들이나 매번 할 법한 똑같은 음주사고 조심해라, 성 관련 사고 조심해라 등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성 관련 이슈를 대하는 군대의 사고관은 여전히 과거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문화에 질려 요즘엔 가서 몰래 책을 읽거나 일기장을 정리한다. 그래도 점점 꼬리가 길어져 언젠가 군인다운 것에 대해 상당히 예민한 간부들에게 걸려 한소리 듣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던 찰나, 외출이라는 좋은 구실이 생겼다. 

일과가 조금 일찍 끝난 덕분에 생활관 책상에 앉아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를 조금 읽었다. 그러다 조금 문득 글을 지금 써두지 않으면 외출 복귀해서 피아노도 쳐야 하고, 연등 때는 최근에 푹 빠진 드라마 <그해 우리는>도 봐야 하니 도저히 쓸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황급히 펜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10분 좀 넘게 쓰니 약 400-500자 정도 쓴 것 같은데, 확실히 손으로 쓰는 게 속도 면에서 정말 큰 단점이 있다는 걸 느낀다. 게다가 실내가 조금만 따뜻해도 금세 손에 땀이 차서 도저히 글쓰기에 오랫동안 집중할 수가 없다. 최근 수기로 쓰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쓰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수기로만 쓰다가는 도저히 내 글의 분량이 옥스퍼드 노트 양면을 채우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고, 글을 길게 써야만 할 때가 분명 있는데, 수기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자꾸 망설이게 된다.

오늘로 전역까지 80일 남았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숫자는 꽤나 빨리 줄어들어, 사회에서의 삶을 어서 본격적으로 준비하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앞으로 11번의 금요일이 남아있는데, 그중 절반은 휴가로 빠질 테니 주간 정비를 할 기회가 채 5번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저 무심히 흘러간다. 느낌의 차이만이 작용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난 무얼 붙잡고, 무얼 놓치고 있을까. 지금껏 지나온 군대에서의 시간을 돌아보면 여러 일이 떠오른다. 열심히 해서 만족할 만한 좋은 결과를 얻었던 적이 있던 반면, 노력에 관한 내 믿음이 흔들리면서 될 대로 돼라 하며 무책임하게 떠나보낸 시간도 있다. 내 모토대로 매일 성장해 나갔다고 말하기에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어리석을 행동을 한 적도 있었다. 결국 성장이라는 건 양자도 약처럼 한순간 일어나는 것 같다. 남은 80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런 순간이 한 번 더 올 수 있을까?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정확히 30분 지났다. 짧은 시간은 아님에도 쓰는 속도가 느려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네. 오늘 외출 나가서 돼지갈비를 실컷 먹고, 돌아와서 주말 동안 늘 하던 대로 할 거 잘해야지. 그리고 오늘 잊지 말고 방한용품이랑 훈련 때 먹을 식량을 좀 사둬야겠다. 슬슬 허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이제 나갈 시간이 된 건가. 옆 생활관에서 한참 뱅을 하던 후임들이 자리를 정리하는, 의자가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마무리하고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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