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쓰는 복학생 Feb 21. 2023

90%

군 생활의 9할을 지나오면서 

정신없이 지내다 문득 군 생활이 55일 남은 사실을 떠올리고는, 군돌이를 켜서 둘째 자릿수가 또다시 바뀐 걸 확인했다. 90%였다.


하염없이 전역만 기다리고 있다. 예전엔 여러 일에 몰입하다 보면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갔는데, 상황이 달라진 건지 똑같은 걸 해도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 글도 매일 쓰고, 피아노도 점호시간에 1시간 정도 꾸준히 연습하다 보니 어느덧 체르니 시작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고, 여행 준비도 틈날 때마다 조사해 이제 비행기나 숙소 예약만 하면 된다. 오히려 어떻게든 시간이 빨리 가게 하려고 급하게 뭐든지 하려고 한 결과,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생각한 것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독서시간을 희생해서 한 거라, 책은 거의 안 읽은 건 좀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래도 시간이 정말 안 간다. 내 앞 선임과 동기의 군 생활은 어느덧 50일도 진작에 깨지고 전역을 눈앞에 둔 듯한데,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 군 생활은 어디에선가 막혀 정체하고 있다. 아마 절대적인 차이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아 보이는 이유는,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서 비율상 차이는 오히려 늘어나기 때문이리라. 결국 그 둘이 전역하는 날에 군인과 민간인의 선을 건너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러한 느낌이 최대치에 이르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남의 군 생활만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 걸 보면, 군 생활이라는 주체가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그만큼 크다는 걸까(일반 상대성이론). 여전히 많은 걸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멈춰버린 것만 같은 시공간 속에서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사실 간단한 다양한 답이 있어서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요즘 밀려오는 부담감과 불안감에 그런 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전부 내려놓고 도망쳐버리고 싶다.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서 내놓은 답도 상황이 바뀌면서 너무나도 쉽게 부정당하고, 군대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 여기 있으면서 해결법을 강구하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 요즘엔 그냥 멍하니 지내며 순간순간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있다. 여행 정도를 제외하면 내 선택에 미래라는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그러다 오늘, 중대 단결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저 멀리 관중석(이라 뭐 한 2층 구석)에서 즐겁게 볼링을 하는 중대원들을 보며, 지금 내 모습이 입대 전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때도 학교 생활 동안 미루고 미룬 여러 과제들이 점점 쌓여 한꺼번에 닥쳐왔고, 결국 그걸 짊어지기를 포기한 채 완전히 다 놓아버리지 않았나. 다행히 지금은 유지하고 있는 관성이라도 있어서 생활이 망가질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은 무기력함 속에 찾아오는 존재에 대한 허무감에 문제가 더 심각하게만 느껴진다. 어차피 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용기 따위는 없는 나라는 건 잘 아는데, 사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이성을 찾지 못하고 어떻게든 도망려고만 할지도 모르는 미래다. 그래서 불안이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또 도망치려고만 하고 있다. 이번에는 기껏 9할까지는 잘해왔는데, 아깝지도 않은 건가. 여전히 살아가면서 마주해야 할 온갖 종류의 부담을 맞닥뜨리는 게 두렵지만, 어차피 다 포기하고 내려놓은 채 속세를 떠날 용기는 없어서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싫어도 남은 54일 동안은 군인이고, 전역하고 4개월 남짓한 시간을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앞으로는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수많은 낯선 것들을 반드시 마주하게 될 거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기에 마땅히 돌아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정면돌파해야 한다. 부담감과 불안감, 그리고 두려움 따위는 지나온 길에 놔두고, 앞으로 찾아올 수많은 낯섦으로부터 비롯될 중압감을 이겨내야만 한다. 군 생활을 통해 성장했음을 증명하고 싶다면, 과거의 나와는 분명 더 나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정말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쓰게 된 계기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언젠가 삶의 한 챕터에 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해주겠다는 일념으로 여태껏 열정적으로 써왔다. 그러나 최근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찌들어 우울하고 부정적 분위기의 글만 쓰는 내 모습을 보면서, 글을 처음 쓸 때의 초심을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 또한 마땅히 담아내야 하는 나의 모습이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아니니까. 오늘 심심해서 읽어본 옛날 글을 썼던 때의 나는 이런 식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그때의 나는, 희망찬 자세로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가지는 않더라도, 찾아오는 역경에 당당히 맞서고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해 나가는 우상향 그래프의 삶(프로필 사진에 담겨있듯이)을 소망하고 있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는 굴곡을 지나다 구덩이에 빠져 좌절하는 게 아닌, 수많은 고난을 극복해 나가고, 그 안에서 성장해 나가면서 당당하게 삶을 개척해 나가는 교양소설(Bildungsroman) 속 주인공의 현실적인 고뇌와 성장과정이다. 지금 나에게 내가 그리고자 한 전개대로 살고 있냐고 묻는다면, 결코 아니다. 남은 10% 동안 어떻게 해야 군대라는 공간에서의 100%를 좀 더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3+3=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