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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May 10. 2023

중동 여행 2일 차-2

두바이 마리나를 거닐며 든 생각들

오전 내로 다 둘러볼 수 있을 줄 알았던 두바이 엑스포에서 너무 길게 있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팜 주메이라로 트램을 타고 가보기로 한 계획은 취소하고 곧장 두바이 마리나로 향했다. DMCC 역에서 내려서 500m 정도를 걸어가면 두바이 마리나 몰이 나오는데, 두바이 몰이나 몰 오브 디 에미레이트처럼 무조건 가봐야 할 정도로 유명한 장소여서 찾아갔다기보다는 이전에 가족이랑 갔을 때의 기억을 되짚어보고 싶었다.



9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이 쇼핑몰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을 게 분명하다. 입점해 있는 브랜드도 바뀌었을 거고, 기타 부대시설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다행인 게 마리나 쪽 입구 부근은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에서의 이미지와 1 픽셀까지 똑같았다. 모든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이 으레 그렇지만,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청과류와 신선식품 코너, 계산대까지 옛 기억 그대로 남아있는 풍경에 설명하지 못할 감동을 느꼈다.


마리나몰 안 슈퍼마켓. 이곳은 내 어릴적 기억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을까. 9년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놀러 온 외국인이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혼자 이곳에 다시 찾아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장소가 변하지 않았음에 감동한다는 사실을. 드라마틱하다면 드라마틱하지만 현실적으로 본다면 그저 감수성 넘쳐나는 한 여행자가 오버하는 것에 지나지 않겠다.




해변가에 가려고 쇼핑몰에서 나왔는데, 오후 5시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더웠다. 4월 말이면 그래도 여름에 접어들 시기는 아니어서 다닐만하다는 내용이 인터넷에 나와있어서 그것만 믿었는데, 고온다습한 34도가 어떤 느낌인지 이미 한국에서의 여름을 통해 잘 알고 있지 않던가. 그나마 해변가로 가면 바닷바람이 불어와 상쾌한 느낌이 조금이라도 남지만, 마리나 부근은 온통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어 더운 공기가 갇힌 와중에 햇볕까지 내려쪄 더욱 후덥지근했다. 별생각 없이 옷을 5일 치만 가져왔는데, 하루에 한 벌씩 입기도 벅찬 날씨다. 결국 현지에서 옷을 좀 싹수 않을까. 핸드폰을 들고 있으면서 지도를 보려다가 금방 폰이 너무 뜨거워져 포기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정표를 따라가면서 다리를 건너고 난 후 20분 정도 걷다 보니 드디어 JBR Beach에 다다랐다.


JBR 비치의 입구에 있는 사인


원래 계획대로라면 해변 너머에서 내다보이는 블루 워터 아일랜드에서 아인 두바이(세계 최대 규모의 대관람차, 실물로 보면 250m라는 높이가 대관람차에게 얼마나 큰 건지 실감하게 된다)를 탄 후 팜 주메이라까지 갔다 온 후 밤에 왔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작년부터 아인 두바이가 운행을 중단했다. 다른 대관람차랑 비교해 높이가 2배는 되는 걸 생각하면 이런 안전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던 건가.




해변에 들어서자마자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바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에 걸맞게 여러 인종의, 다양한 특색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 휴양 온 듯한 노부부, 여행 와서 해변에서 일광욕과 해수욕을 즐기는 연인 등. 요즘 내 상황을 대변하는 건지 유난히 애들이랑 연인들에게 좀 더 시선이 가게 된다. 아 인정하기 싫어도 사랑이 고픈가 보다 나. 막상 그렇다고 내 상황을 바꿀 만한 결단력을 보이지는 않을 거면서. 그냥 매번 똑같은 내용으로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내 모습을 시간이 지나고 돌아본다면 얼마나 한심하다고 느낄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이런 생각들을 상념 따위로 치부하고 넘기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세계 최대 규모의 대관람차 아인 두바이가 보이는 JBR 비치의 풍경. 사진으로는 체감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꽤나 먼 곳에서 봤는데도 정말 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두바이의 세련된 도시 풍경 속 수많은 고급 호텔과 럭셔리한 서비스들을 보면서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욕망들을 확인한다.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성공이라는 개념 자체가 각자 안에 품고 있는 수많은 욕망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내가 두바이에 온 이유 중 하나는 성공이라는 일종의 결과를 쟁취하기 위해 욕망을 확인하러 온 게 아닐까 싶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는 게 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사실 이상적으로는 그런 걸 무작정 따라가고 싶지 않다는 소신이 있기도 하고, 하나하나 구체화하면 저급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져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정처 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다. 더위를 피해 해수욕장에 와서 맨살과 가슴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나 같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모래밭에 푹푹 커지는 나이키 에어포스원을 신고 흰색 캘빈 클라인 티셔츠와 카키색 유니클로 코튼 팬츠를 입은 동양인이 생각에 잠긴 채 해변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경우는 더더욱.



오기 전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계획에 집착했지만, 막상 그게 흐트러져 의미가 없어지니 너무나도 많이 남아 버린 시간과 함께 찾아온 여유 속에서 일몰을 기다리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아무 의미 없이 해변을 따라 걸으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뿐이었다. 가릴 듯 말 듯 몸매를 자랑하는 듯한 옷차림으로 해변에서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경험에서 배경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는 해변가의 고급 호텔과 레지던스 빌딩. 욕망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공간이 바로 두바이 JBR Beach였다.




내가 추구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좀처럼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와 관계없이 20대라는 청춘의 시간 동안 착실히 준비하고, 그 후 찾아올 인생의 전성기에 반드시 무언가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당장 가진 거라고는 어드바이저가 이메일조차 제대로 확인 안 하는 (나름 명문이라고 지칭하는) 대학교의 학생 신분뿐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군대에서는 막연한 불안의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면, 여기서 내가 마주한 건 확실한 불가능의 느낌 같은 것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누리는 수많은 특권들을 나 역시 언젠가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들, 내 욕망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들의 진정 실현할 수 있는가에 있어서는 심각한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그런 이유들로 해변을 절반 정도 걷는 동안은 무력감 속에 고뇌에 빠져들었다. 세상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삶을 살고 싶다는 야망 넘치는 목표의식과는 대조적으로, 개인적 욕망이라는 작은 문제에조차 쩔쩔매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그러나 해변의 절반을 넘어서는, Public Beach와 Private Beach의 경계선에서(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그런 경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닷가를 거니는 낙타를 보고 머리에 찬물을 붓는 듯한 시원함과, 동시에 두통이 찾아왔다.



바다와 낙타. 한쪽은 물의 형태 그 자체고, 다른 한쪽은 물이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면서 진화해 왔다. 보통 낙타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우리가 떠올리는 건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막을 유목민과 함께 떠도는 이미지다(그들이 찾아 나서는 건 오아시스인 걸까). 그러나 두바이라는 도시에서 발견한 바다와 낙타가 이루고 있는 모순적 조화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꿋꿋이 존재하고 있었다. 상상 밖의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은, 통념 속에 매 순간 자연스럽게 제한해 온 우리 안의 알을 깨라고 말하는 듯했다.



보통이라면 상상하던 대로 낙타의 공간은 사막에 국한되어 있겠지만, 두바이는 우리가 상상에서조차 한계를 설정해 놓은 것들을 현실에서 당당히 깨부순 곳이었다. 물론 관광객들의 관심을 끔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겠지만, 낙타를 모는 사람의 의도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에게 해변가를 따라 걷는 낙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해변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나, 그리고 정반대 방향에서 오는 낙타, 그 둘이 긴 해변의 중간지점에서 교차하는 순간 운명에 미묘한 변화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해변을 지나는 두 마리의 낙타


남은 반을 갈 동안에는 희망의 감정 비슷한 걸 품었다. 동시에 일몰이 가까워지면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주자, 마냥 뜨겁게만 느껴졌던 태양빛에서 포근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해변에 끝에 다다르니, 여타 한국의 해수욕장과는 달리 하나의 큰 해변이라고 생각했던 게 프라이빗 비치와 퍼블릭 비치로 나뉘어 있고, 근처 출입구가 주변 고급호텔과 연결되어 있어 결국 다시 처음에 왔던 곳까지 돌아가야만 했다. 가장 가까운 출구를(길이 뚫려있다기보다는 새로 짓고 있는 호텔 공사장과 옆에 있는 호텔 사이의 작은 공간을 사람들이 오고 가는 듯했다) 발견하고 그쪽으로 나가니 해변에서 보던 휴양지와 관광지로서의 이미지와 대조되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두바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행렬이 있었다. 한 순간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넘어온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위치 링크: Marina Beach  https://goo.gl/maps/4j3SQTxeZitku61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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