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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Oct 01. 2023

인생의 시야

요즘은 정말 멀리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절대적으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마음속에 존재하는 불안 때문에 나에게 주어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지 않고서는 영 성에 차지 않아 뭔가 다른 즐겁고 의미 있는 일에 좀처럼 손을 못 댄다. 당장 과제나 강의 내용 따라가기에 급급해서 내가 가장 멀리 보는 시간은 과제 제출 한, 많아야 7일이다. 문제는 그런 시간 관리 속에서 정작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노는 것도 아닌데 또 그렇게 치열하게 배우는 지도 모르는 상황에 자연스레 답답함은 쌓여만 간다.


노력만 한다면 생활에 여유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달리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는 건 아직은 먼 길이다. 그토록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여태까지 혼자서 학교를 벗어나 본 적도 없고, 캠퍼스에서도 다니는 곳 외에는 대부분은 안 가봤다. 여유를 가지고 순간을 즐기면서도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하는데, 당장 그러기에는 내 앞길에 산더미같이 쌓은 과제기 발목을 붙잡는다. 어딘가 하나도 정리된 게 없는 엉망진창인 인생의 질서를 다잡기 위해 꽤나 오랫동안 노력해왔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 하루의 일을 처리해도 오히려 더 많은 과제가 쌓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군대에서, 그리고 전역한 이후에 여유가 있을 때는 장기적인 삶의 비전이나 가치관, 방향성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데에 꽤나 많은 시간을 쏟았다. 당연히 공부는 지금 훨씬 더 많이 하지만 그때처럼 정신적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지는 않는다. 꿈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부풀게 했던 여러 목표는 구체화, 수치화되면서 분명한 그림이 나타나니 물에 젖은 솜처럼 확 무게가 실리고, Stanford Doerr School of Sustainability나 최소 10만 달러 연봉을 받는 직장이라는 당장은 막연해 보이는 경지에 이르기 위한 과정 속에서 장기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은 설자리를 잃는다. 나를 들여 다기보다는 남을 올려다보는 일이 더 잦아지고, 자신에 대한 확신 속에서 반성하기보다는 의심하는 일이 잦아진다. 해안 도시에 살지만 바닷가에 간 건 한 번 밖에 없다.


풍요 속 빈곤이라는 말이 매 순간 와닿는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지내지만 정작 그 안에서 비롯되는 다양성을 직접 접하면서 배울 기회는 지나치게 한정적이고, 공부는 많이 하지만 지식이 제대로 쌓이고 있는 건지 되돌아볼 기회가 없어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여러 어려움이 많지만 여기서의 한 달이 꽤나 편하다고 느끼는데, 내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낯섦과 부끄러움의 기회를 좀처럼 잡지 않기 때문인 걸까. 편안함과 익숙함을 어떻게든 피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상반된 두 가 지 것들이 상호 배타적인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중요한 결정을 하나 내리기로 했다. 지금부터 올 한 해가 끝날 때까지 조금씩 데이터를 모으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모르겠다. 어차피 앞으로 10년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데 자꾸 멀리 보는 데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지금 마주하는 한순간 한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뭘 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다음 주에 미드 텀 끝나면 책 한 권 가지고 어디든 가서 여유를 만끽하며 새롭게 시야를 틀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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