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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Jan 26. 2021

아빠 미안해


오랜만에 친정행을 했다.
친정에 가면 늘 아빠에게 틱틱대고 날카롭게 날이 서서 뭐 하나만 건드리기만 해봐 벼르고 있는 사람처럼 공격을 퍼부어 대던 나였다.
그렇기에 이번 방문에서도 아이앞에서 그런 모습이 나오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들은 기우였다.


심리치료를 받고, 심리학을 공부하며 나는 많이 변해 있었다.
평소 단점으로 느껴지던 아빠의 행동들에서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어쩌면 내가 지금껏 생각해온 아빠의 모습은 내가 나의 잣대로 만들어 버린 아빠였다는 깨달음까지 얻었다.


지난 글에서 적진 못했지만 (과한 표현이라 순화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사실 아빠에 대한 이미지는 '인간같지도 않은 형편없는 한심한 사람' 이었다. 심리센터에서 '나에게 아버지란?' 이란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그 정도로 내게 아빠는 증오와 혐오의 존재였다. 나는 아빠가 소름끼치도록 미웠고 싫었고 아빠와 닮은 점이 있다는 신랑의 말에 수치심마저 느꼈었다.
하지만 이번 방문에서 나는 아빠에게 단 한번의 화도, 짜증조차도 내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에게 감사함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 보았다.




아빠를 엄마에게 의지하는 무책임한, 아빠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생각을 해왔지만 손녀와 놀아주는 아빠를 보며 아빠가 아이와 이렇게 잘 놀아주는 사람이었나? 하고 놀랐다.
엄마가 나와 융합하여 형성했던 아빠와의 적대적인 삼각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이에게도 할아버지와 친해질 기회조차 주지 않던 나였다. 할아버지와 아이가 놀 수 있는 틈을 준 적도 없었고 그렇기에 아이와의 제대로된 놀이를 이제서야 처음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분명 아빠는 육아나 놀이에 대한 이론은 없었을 것이지만, 본인의 느낌으로 놀이를 완벽하게 아이주도로 맞춰주고 있었고 나조차도 힘들었던 아이와의 놀이를 저렇게 즐겁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심지어 놀이의 이론에 부합하는, 이성적으로 계산한 놀이가 아닌 정서적으로 가슴이 이끄는대로 놀아주고 있었고 아이는 오은영쌤이 말하던 정서적 밥을 할아버지에게서 듬뿍 섭취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며 문득 아빠와 놀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기 시작했다.
함께 자전거를 탔던 기억, 운동장에서 나랑 놀아주던 아빠, 무전기를 가지고 경찰놀이 하던 것, 곤충채집을 함께 해주던 아빠, 늘 아빠의 퇴근시간만을 기다렸다 퇴근한 아빠와 두던 오목까지.
엄마의 아빠에 대한 평가가 내게 덧씌워져 엄마의 시선대로 바라봤던 나의 아빠에 대한 이미지는 너무나 편협하고 왜곡된 것이었다.
나의 아빠는 결코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는 가족들이 부탁하는 것들을 군말없이, 싫은 티 한번 내지 않고 해주고 있었다.
무엇을 사와달라는 심부름부터, 전등을 갈아주기도 하고, 내가 추워서 나가기 싫으니 분리수거 좀 해달라는 말에도 냉큼 일어서서 모든 것을 해주었다.
물론 일을 찾아내서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족들의 부탁이라면 모든 것을 솔선수범 도왔다.
엄마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니 "다른 사람말은 안들어도 항상 니 말이라면 다 들어주지 않았니." 라는 말에 눈물이 터질뻔 했다.
그랬다. 그땐 몰랐다.
혹여나 알았더래도 그저 아빠로서 권위가 없어 딸의 말에 휘둘리는 한심한 사람이라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한심해서, 바보같아서 딸의 말을 다 들어준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고, 누구보다 아꼈기에 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노력한 것이었다.
주변에서 그렇게 건강검진을 가라 할때도 수년을 안가고 버티던 사람이 내 말 한마디에 병원행을 택했던 사람이다.
폰에는 아들과 와이프 이름은 이름 그대로 저장되어 있을지라도 내 이름만은 '예쁜공주' 라 저장되어 있고, 34살 먹은 지금까지도 나를 공주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아빠의 지극한 사랑을 나는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게 휘둘리는, 내게 말한마디 못하는, 내 눈치나보는 한심하고 바보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자랐다.
정작 한심하고 멍청했던 사람은 나였던 것을..


늘 운동이 우선인 아빠에게 그 시간에 돈이라도 더 벌어오라는 모진 말을 쏟아내었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그러한 노력덕에 집의 가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긍정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꾸준한 운동덕에 아빠는 또래보다 건강하고 그 건강함이 노후의 자산이 되어 여전히 정정하게 일을 하시고, 아빠의 노후 건강에 대해 자식으로서 걱정을 덜 할 수 있지 않나 감사하기도 하다.




늘 최악의 상황에서도 아빠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긍정적이었다. 그런 아빠가 얄궂게만 느껴졌었고 우린 이렇게 힘든데 혼자만 긍정적인 아빠가 싫었다.
그런 모습을 지금의 나는 부러워하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부던히 공부하고 노력중이다.
그렇게도 닮고 싶지 않던 아빠의 모습을 지금에서야 나는 닮고 싶어, 닮으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참 나쁜 딸이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는 불효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나쁜 마음을 먹고 있던 딸이었음에도 아빠는 늘 딸을 온 마음을 다해 품었다.




이제서야 보인다. 아빠의 사랑이..
미안해 아빠. 정말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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