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나 큰 아픔을 겪었고, 큰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참 많이도 아팠고, 참 많이도 힘들었다.
사춘기 시절 크게 방황하기도 했고
삶의 목적을 상실한채 마구잡이로 살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내게는 늘 어떠한 명확한 선이 존재했다.
사춘기 시절 방황을 할 때에도
폭력적인 친구들 사이에서도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비행집단에 있다보니 성적으로 조숙한 친구들이 많았음에도
끝까지 순결을 지켜오기도 했다.
학급에서 누군가가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도,
자신이 따돌림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아 모두가 방관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나는 늘 따돌림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이를 더욱이 품었다.
잠시 방황을 하다가도
금세 생각을 고쳐먹고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했다.
평생을 가치관이라는 것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무의식중에 나의 삶의 가치는
악보다는 선을 향하고 있었고,
나만의 절대적 기준 안에서
그 선만은 절대 넘지 않고 지켜내며 살아왔다.
상담사는 내게 물었다.
이러한 흔치 않은 고통을 겪었고,
삶에 크나큰 풍파들을 겪어왔음에도,
수빈씨가 그것을 견뎌내고, 이겨내고,
심지어 그것을 발판삼아 성장하고 있는 힘이 무엇이죠?
나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공부하고,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하고,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돕기 위해
끊임없이 성장하려고 하는 힘은 어디로부터 온걸까요?
그 순간, 문득 엄마의 희생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나를 위해 희생했고,
나를 위해 살아갔다.
그런 엄마의 희생을 생각하면
나는 거기서 멈추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일어서야만 했고 나아가야만 했고
엄마를 위해 힘을 내어야 했다.
라고 이야기했다.
캐나다에 어학공부를 하러 오랜시간 나가 있을때에,
캐나다에는 대마초가 합법이었기에 주변 모든 한국 유학생들이
한두번쯤은 호기심에 대마를 경험해보았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내게도 수없이 많은 권유가 있었지만
절대 마약에 손을 댈 수 없었다.
나를 믿고 캐나다에 보낸 엄마에게 해서는 안될 짓이었다.
모든 유학생들에게 일반화할 순 없지만
쉽게 영어를 배우기 위함으로
소위 바디랭귀지를 선택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쉽게 말해 영어권 사람들과의 성적 접촉을 통해
영어를 쓸 수 있는 환경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동양인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의 접근,
아니 진실로 다가온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결코 거기서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았다.
엄마에게 부끄러운 딸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를 위해 나아갔고,
이어서 든 생각은 아이를 위해 또 한번 힘차게 나아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담사는 그것들은 수빈씨의 외부적 영향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곰곰히 들여다보면
외상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강한 성장욕구를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해 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 내면의 어떠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담사는 내게서 무수히 많은 역량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직접 발견해내기를 바라는듯
거기에 대해 하나하나 일일히 꼽아주지 않았다.
앞으로 차차 찾아나가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상담사와 탐색과정에서 찾아낸 나의 역량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계의 소중함을 아는 것.
또한 누구보다 강한 책임감이라고 했다.
그렇게 사람으로 인해 아픔을 겪고, 다치고, 힘들었음에도
나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충만했다.
늘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늘 사람들과 쉽게 관계를 맺었다.
불신 속에서도 사람을 향한 애정은 한결같았다.
어쩌면 애정의 표현이 잘못되어 불신으로 나타났을 수 있겠다는 생각.
나의 불신과 적대감의 진짜 모습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었으리라.
그것의 진짜 본질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었으리라.
열등감과 우월감이 같은 맥락에서 통하는것 처럼,
나의 불신과 적대감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같은 맥락에서 드러났던 것은 아닐까.
상담사는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데도 정말 중요한 역량이 될 수 있지만
상담사가 되는 과정에서 정말 크나큰 강점이 될 것이라고 일렀다.
상담사로서 정말 충분한 자질이 될 수 있고
그것이 큰 역량으로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또한 완벽주의의 형태로 나타나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내게는 엄청난 책임감이 존재한다고 했다.
비행을 하면서도 선을 지킬 수 있었던 것 역시 책임감의 한 형태였을 것이고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 엄마로서의 책임감을,
결혼 후 남편에게 8년간 요리한번 시키지 않은 것은 아내로서의 책임감을,
자기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찰하는 것은 나에 대한 책임감을,
부모에 대한 크나큰 부채감은 자식으로서의 책임감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감으로부터
나는 나 자신을 지켜내고 성장시키고 있었고
추후 상담사가 되었을때도 큰 역량으로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종종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블로그에 나의 아픔들을 공개하는 것이,
어쩌면 상담사로서 섰을때 내담자에게 불신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아픈 상담사를 내담자가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의 과거가, 나의 아픔이,
상담사로서 온전히 서는 것을 방해하는 약점이 되진 않을까.
가장 큰 걱정은 나의 아픔이 상대의 아픔을 어루만지기는 커녕
내담자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나는 인지가 강한 사람이고, 감정이 약한 사람이었다.
감정도 인지로 통제하고 다스렸다.
이러한 인지적 방법이 편했지만 늘 감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잘되지 않았다.
늘 인지를 누르려하고,
인지만을 사용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담사는 정서적으로 크게 다쳤었기에,
인지가 없었으면 나는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서적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인지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인지가 나섰기에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고,
인지가 정서를 보듬을 수 있었고,
인지적으로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인지를 사용하는 내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인지적 강점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감정이 부족하거나 혹은 배제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인지적이기만 한 사람이라면 증상은 불안이 나타나야 함에도
MMPI에서 나는 우울감이 주요 증상이었다.
분노로 표현되지만 기저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감정이 부족한게 아니었다.
그러한 감정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어색해, 불편해,
마음 속에 꽁꽁 감추어 두고 인지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인지가 편하니까.
감정을 숨겨놓고 주지화하는 것이 내가 덜 상처입는 방법이었으니까.
이제는 숨겨둔 감정을 조금씩 꺼내어 들여다보고
어루만져 주어야 할 때인가보다.
나의 내면 어린아이가 내내 마음속에서 울며 슬퍼했고,
나의 강인한 인지라는 아이가 그 작고 나약한 어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총대를 둘러매고 표면으로 나와 홀로 고군분투 해왔었나보다.
내면의 어린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인지로인해 더이상의 상처는 받지 않고 지켜졌겠지만,
꽁꽁 가두어놓고 상처를 숨기고만 있으니
이미 입은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나보다.
이제 숨어있던 내면아이를 꺼내어
보듬고 살펴야 할 때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