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의 지인 중에는 나와 굉장히 유사한 성격패턴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지나치리만치) 밝고, 재미있었고, 뒷담화와 말옮기기를 좋아하고, 또 반사회적인 성향에 불행했던 아동기 경험까지도 나와 닮아 있었다.
물론 MBTI 결과도 매우 유사했다.
나는 그 친구가 좋았다.
나와 비슷한 성격때문인건지 뭔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단순하게 그 친구가 밝아서 좋았고
웃겨서 좋았고 재미있어서 좋았다.
내게있어 그 친구는 하나의 '자극'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와 나의 주변 사람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하나둘 친구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더이상 그 친구와 엮이고 싶지 않아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생겨났다.
나와 유사하다 생각되는 그 친구의 곁은 다들 떠났으면서도,
왜 나의 지인들은 나의 곁은 여전히 지키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얼마전, 나는 학창시절의 친구와 만남을 가졌다.
나의 미성숙함과 유치함, 그리고 못된 모습까지도
자각하고 있는 요즘의 나는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감사함과 함께 의문을 가지던 차였기에
친구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나처럼 뒷말하기 좋아하고, 말옮기는 것도 좋아하고,
철없고 유치하고 미성숙한 사람임에도
아직까지도 내 곁을 지켜주는 이유가 무어냐고.
친구는 나의 '밝음'이라 대답했다.
나 역시 나의 밝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파워 외향형 아니었던가.
예전 지붕뚫고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이 한창이던 때,
내 주변 지인들은 거기에 나오는 황정음의 캐릭터를 보고서
날 보고 만든 것이 아니냐
할 정도로 그 캐릭터에게 나를 대입하곤 했다.
그 캐릭터는 상당히 유치했고, 미성숙했고,
어쩌면 약간 모자라보이기도 한 캐릭터였다.
다 큰 성인이 고딩 연기를 하며 '띠드버거'를 외치기도 하고,
또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정말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캐릭터였다.
나는 그 캐릭터에게서 원초아를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던 그 자극적인 친구에게서도 원초아를 느꼈다.
본능과 욕구, 충동을 그대로 여과없이 드러내는 그러한 캐릭터.
그런데 상담사는 내게도 역시 원초아가 매우 강한 사람이라 한다.
투명해서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사람이라 한다.
또한 여우의 모습을 한 곰이라는 표현도 했다.
사실 나의 글은 기교도 없고, 어떠한 스킬도 없고,
굉장히 투박하고, 또 거친 원초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글 자체만 보았을때, 내 글은 어디에 내놓기도 부끄러울만치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글 같은 느낌이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느낌이라거나,
한들한들 갬성을 담고 있다거나,
혹은 그럴싸한 어휘를 갖추고 있지도 않고,
종종 글이 산으로 가는 삼천포를 보일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회수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타인들이 감추어둔 판도라 상자와 같은
그러한 유사한 감정들을 여과없이 노출하고 있고,
그것이 자극적인 소재로 사람을 끌어모은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출판사의 투고에 성공하였음에도
나는 출간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글의 진정성, 그리고 자극성
그것 이외에 나는 내세울 것이 없었으므로.
어쨋든 내 글에서는 나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나는 글에서처럼 본능과 욕구, 충동, 약점까지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비추어 지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자극'이라 생각했다.
자극적인 사람이라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 생각했다,
자극적인 글을 쓰기에 사람들이 글을 찾아준다 생각했다,
자극적인 여자라 젊은시절 남자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극은 불량식품마냥
당장에는 찾게되고, 즉각적인 충족을 가져다 주지만,
정신건강에는 해로운, 나를 해치는
그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20여년,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와 함께 해주고, 나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유형의 그 친구의 곁은 떠난 이들 마저도
나의 곁은 여전히 지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와 나의 '자극'의 차이가 궁금했다.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 나는 반사회적이고 적대적이고,
뒷담화를 좋아하고, 또 타인의 말을 옮기는 것도 좋아하는,
미성숙하고도 유치한 사람이었다.
상담을 시작하고서 나는 이러한 나의 모습들이
타인과 나 자신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해로운 모습임을 인지했고 고쳐나가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군다나 타인들이 나의 곁을 지켜주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친구들은 내가 밝아서 좋다 했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잘 알다시피
미성숙하고 철없고 뒷담화 좋아하는 반사회적인 사람이다. 라고 했고
친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밝음 이면에 있는
인간을 향한 애정, 그리고 정의감, 또 친사회적인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뒷담화를 하지만 그것에 어떠한 악의가 없음을 느꼈다 했고,
반사회적이라 말하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챙기는 모습을 느낀다 했다.
가식적인 밝음이나 선을 넘은 과도한 밝음이 아니라
투명하고 순수한 밝음을 보여주기에
여전히 나의 곁을 지킨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나와 비슷한 성향의 친구와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내가 '자극'이라 표현했던 특성은
나의 경우, 어쩌면 자극이 아니라 순수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내가 자극이라 표현했지만,
타인들은 그것을 순수라 해석하고 있었다.
자극과 순수는 한끗 차이였다.
전혀 반대의 것처럼 느껴지지만
같은 맥락에서 상통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마라맛이 아닌,
자연 그대로, 본연의 맛의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상담 1회기때 상담사는 내게 순수한 사람이라 말해주었다.
친구들 역시 내게 순수하다 말하고 있다.
처음 상담사에게 순수라는 말을 들었을때는
그것에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었다.
'내가 모자라다는 건가?'
내게 있어 순수는 약간은 모자라고, 시골틱한 사람의(비하발언은 아닙니다.)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게 미워하던 아빠를 좋게 말해 순수라고 표현하곤 했다.
한번은 남편이 내게 "너의 성격은 장인어른과 닮아있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빠의 장단점을 모두 통합시키지 못하고
아빠는 그냥 나쁘고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였기에
그 말을 들었을때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이제서야 알것 같다.
나의 순수는 아빠에게서 온 것임을.
나는 아빠의 순수함을 닮았다.
나는 타인에게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모두 공유하길 좋아한다.
때론 자기 자랑도 하고,
유치하리만치 허세를 부리고 과시를 할 때도 있다.
좋으면 그냥 방방 뛰고,
싫으면 바로 우웩 해버리는
특유의 직설적인 모습도 나타난다.
나는 속에 있는 것을 숨기지 못한다.
그렇기에 앞뒤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피드백 받기도 한다.
무언가 혼자서 담아두는 것은 못한다.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나의 순수함을 좋아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러한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나의 글 역시 자극이 아닌, 순수라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뒷담화를 일삼고, 반사회적 모습을 보임에도
타인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은 이유는
그 이면의 순수함과 친사회적인 모습일지 모르겠다.
나의 모순적인 성격을 통합시키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모순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모순때문에 양극단의 모습이 나타날때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모순적인 성격이었기에
우울을 극단으로 끌고 가지 않았고,
반사회성 또한 극단으로 이끌지 않았다.
타인이 잘되면 배가 그렇게나 아팠으면서도,
왕따 당하는 친구는 보지 못해 늘 감싸고 들었다.
학교다닐때 비행을 일삼곤 했으면서,
비행하는 청소년들을 보면 정의감에 불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상담사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은 흔히
인간의 실현경향성을 믿고, 긍정적인 존재라 생각하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성악설,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에는 악과 선이 함께 존재한다.'
는 것이 나의 개인적 인격체로서의 인간관이자,
상담사라는 정체성에서의 인간관이었다.
수년을 지속해온 나의 인간관 역시 굉장한 모순을 가지고 있기에
어쩌면 나의 성격의 모순도, 나의 양극단의 모습도,
그것으로부터 발현되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