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우울을 경험하는 이들을 떠올리면
무기력해서는 아무런 의욕도, 의지도 없이
어쩌면 생을 마감하고 싶어한다는
그러한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곤 한다.
나 역시 우울은 그러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하기에 나는 나의 우울을 쉽게 인지하지 못했다.
출산 이후 나는 과도하게 예민해지고 불안해져
쉽게 분노를 쏟아내곤 했다.
별거 아닌 일로 여기저기서
분노가 빵빵 터져나오는걸 보고는
나보다도 아이에게 영향이 갈 것 같아
상담센터를 부랴부랴 찾게 되었고
주호소문제 역시 '분노조절' 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심리검사 결과로서
우울을 진단 받았을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닌데에??? 저 안우울한데에???"
납득이 안갔다.
우울의 형태는 굉장히 에너지 다운이 심해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는 분노로서 표출이 되어
에너지다운 보다는
오히려 에너지흥분의 상태로 나타났기에
우울을 전혀 의심할 수 없었다.
난 오히려 조울이라면 어느정도 납득이 갈 것 같았다.
불안장애라거나 혹은 파괴적기분조절장애라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여러번의 검사에서도 나는 우울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오곤 했다.
당시 상담사는 위장된 우울을 이야기하곤 했다.
스스로가 우울하지 않다, 행복하다, 육아가 즐겁다, 아이가 좋다.
라고 무의식중에 세뇌를 시키며
스스로는 우울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상담공부를 하며 알게된 사실은
우울은 무기력하게도 나타나지만,
반대로 에너지흥분의 형태인 초조, 불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우울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나의 성향상의 이유도 있었던듯 하다.
나는 우울의 기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또 반대되는 성향의 외향성, 그리고 반사회성과 같은 상충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울을 과도하게 끌고 가지 않고
외향성과 반사회성이 우울을 조금은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것 같았다.
웃긴 얘기지만 나는 가위에 눌리면
가운데 손가락을 힘주어 펴려고 노력하고,
입으로는 ㅆ....ㅣ...바....ㄹ 을
억지로 힘을 내어 욕짓거리를 내뱉곤 했다.
가위에 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니가 귀신이든, 환상이든, 무엇이든
그것에 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는 출산 당시에도
진통에 지지 않기 위해
진통 내내 욕지껄이를 해대던 철딱서니없는 엄마였다.
간호사는 내게 수시로 찾아와
"엄마! 왜 자꾸 욕을 하세요!"
라며 앙칼지게 무어라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통이라는 것에 질 수 없었다.
그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내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유치하게도 나의 센 모습을 표출 하는 것이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마치 겁먹은 강아지가 큰 소리로 짖듯이.
나는 강하고 센 모습을 내비쳤지만
그것이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나는 지지않기 위해,
이겨내기 위해,
욕을 하고
센척하고
자신감 넘치는 척 했던것 같다.
나 역시 그런 모습에 속아
내가 나를 그러한 사람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는 우울하지 않은 줄 알았다.
우울을 진단 받고
한동안은 부정했던것 같다.
어떤 이들은 우울하기에 자살을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한번도 자살을 진심으로 떠올려본적이 없다.
육아우울로 고생할적에도
죽니 마니 뛰어내리니 마니 했지만
사실 절대 진심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이 정도로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거라 생각했기에
나의 고통의 정도를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 방법이었다.
이제서야 고백컨데
뛰어내릴,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뱃속에 태아를 낙태할때
아기들은 살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뱃속에 들어온
칼날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고 했다.
그렇게 좁은 뱃속에서 칼날을 피해
도망치다보니
조각조각 찢겨져 나온 태아의 사체는
여기저기 멍투성이가 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여아의 경우
그 살려는 생존욕구와
살아내려는 의지가
더욱 강렬하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종종 우울을 느낄때면
내가 마치 그 태아가 된 듯한 느낌을 느끼곤 했다.
나의 우울은 마냥 무기력해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회에서 고립되어
그저 생을 마감하고 싶다
하는 우울이 아니었다.
나는 우울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살아내려 애쓰는 아이였다.
칼날을 피해 어떻게든 뱃속에서
살아내려 죽을 힘을 다해
피해다니는 그 태아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우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려
이를 악물고
살아내려는 태아였다.
나의 반사회적인 모습이
직설적인 모습이
과잉에너지가
사회적으로 종종 부적응적인 모습으로
표출될 때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나의 그러한 모습들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지 않고
나를 생존할 수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성격을 발전 시켰을 것이고
또 이러한 성격으로 타인과 마찰을 빚기도,
삶이 고단해지기도, 피곤해지기도 했지만
생존에는 분명한 역할을 했기에
당시 나의 최선의 선택은 그러한 성격을 발달시키는 것이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모든 이들의 상황상황마다의 선택은,
어떠한 선택을 했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나의 모든 성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살아가게 해준
그러한 특성들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제는 그러한 특성들이
강점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어야지.
사회에 선한 영향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나의 생존 뿐 아니라
타인의 생존까지도 도울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도록,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의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이제야 나는 진실로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