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게 너처럼 순한 아이는 없었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아가때 너는 너무 순해서
젖병만 물려주면 그대로 알아서 혼자 자고 먹고 하던 아이였다 라고
나를 회상하곤 했다.
물론 아가시절 나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니
엄마의 기억에 의지해서
그저 내가 그러했구나
난 순하고 무던한 아이였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는 누굴 닮았는지
매우 예민했다.
까탈스러웠다.
두돌까지 낮잠은 절대 바닥에서 재우지 못했다.
이 후에는 바닥에서 낮잠을 잤냐고?
아니, 이미 17개월에 낮잠이 사라져 버려
결론적으로 낮잠을 바닥에서 자본적이 없는 아이였다.
매우 예민해서
조금만 소음이 있어도 벌떡 일어나
에엥 울어대던 아이였고
여전히 이불의 바스락 소리에도
금세 잠에서 깨는 예민한 아이였다.
그 뿐 아니라
밥먹는 것도 어찌나 까다로운지,
먹이고 재우는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아이에게 엄마는 늘
누구 닮아 예민한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던지곤 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내가 예민한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의 세세한 감정 변화를
1분 1초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캐치해냈다.
다른 사람은,
아빠도, 할머니도, 친구들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아이의 세세한 감정변화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캐치하다보니
나는 늘 아이의 마음을 살폈고
그것은 나를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다.
육아에 있어서도 예민함은 발현되었다.
유기농에, 삼시세끼 식판식을 꼭 제대로 해먹여야 했다.
아이가 5살이 될때까지는 스마트폰, 티비 한번 노출하지 않았다.
아이 앞에서 나조차도 스마트폰을 쓰지 않으려
각고의 노력을 했다.
이른 나이에 기관에 보내는 것도
내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만의 특성에 의해 나타나는 행동들도
나는 문제행동과 연관지어 생각했고
육아를 하며 모든 걱정과 근심을 끌어안고 사는
아주 예민한 엄마였다.
나는 그제서야 나를 알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었구나.
출산 전,
꽤나 무던하고 덤덤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행동들은
돌아보면 나의 기질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미세한 감정 변화들을
애써 외면하거나 애써 쿨한척 표현하곤 했다.
나의 감정이 미묘하게 변할때마다
나는 민감하게 눈치채고 불편했지만
그것을 늘 쿨한척 표현하곤 했던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꽤나 어린 시절부터도 예민한 아이였다.
나는 시골 할머니집을 꽤나 힘들어하곤 했다.
학교에서 공공화장실 사용을 하지 못해
6학년때까지도 하루종일 대소변을 참고 있다가
하교와 동시에 집에 달려오던 아이였다.
타인의 감정변화를 매우 세심하게 캐치해내던 아이였어서
눈치가 빠르다는 얘기를 자주 듣곤 했다.
후각도 매우 발달해 있어서 개코라는 별명도 있었다.
미각도 어찌나 발달해 있는지
20살이 될때까지 고기를 먹지 못했다.
삼겹살, 미역국, 소고기국, 된장찌개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고기비린내와 멸치비린내를
기가 막히게 느껴 성인이 될때까지 편식이 매우 심했다.
엄마가 멸치를 감쪽같이 숨기고
넣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기가막히게 그것들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접하는 음식을 먹은 날은
자는 동안 구토를 하기도 했다.
팬티도 불편해서 엉덩이를 가만히 있지 못하던 아이였다.
나는 그렇게나 예민한 아이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순하고 무던한 아이였다 표현한다.
그리고 엄마가 잘못 알았음을
나는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아니, 엄마.
나는 순하지 않았어.
나는 예민한 아이였어.
나의 예민함을 엄마의 무심함으로 외면했기에
표출하지 못한거였어.
나는 너무나 예민한 아기였지만
엄마의 무관심에 그저 적응해 갔을 뿐이야.
울어봤자 돌아오는건 없었으니까.
엄마는 내게 종종 6살까지 젖병을 끊지 못해
6살에도 젖병을 매일 물고 다녔던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그리고 젖병을 떼지 못해
엄마는 내가 보는 눈 앞에서
모든 젖병들을 모아놓고 불에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네 젖병은 뗄 수 있었다고
당당히 말해주곤 했다.
아이를 키우는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그게 여섯살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싶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을까 하고 말이다.
딸아이는 7살 지금도
애착인형인 젤리를 놓지 못한다.
어디 갈때마다 데리고 가야하고,
잠을 잘때도 젤리가 없으면 잠에 들지 못한다.
아이에게는 엄마를 대신 해 줄 수 있는
엄청난 애착대상이다.
여전히 등원할때 젤리에게 꼭 인사를 하고 가고,
하원해서는 젤리부터 찾아 냄새를 맡고 껴안으며
젤리를 통해 안정을 되찾곤 한다.
6살의 내게는,
그 젖병이 나의 애착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매일을 물고 끼고 다녔겠지.
엄마는 그러한 애착대상을
내가 보는 눈 앞에서 불에 태워 버렸다.
이후 나는 젖병을 입에도 담지 않았다고
전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얼마나 속상했을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동생이 강아지 타령을 하는 바람에
동생이 모은 용돈으로
우리집엔 작은 페키니즈인 '공주'가
가족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내 블로그 아이디가 공주인 이유가
공주병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때의 공주를 여전히 잊지 못해,
그리워, 죄책감에,
나는 공주라는 아이디를 버리지 못했다.
엄마가 한창 힘들때였긴 하다.
초등학생 딸과 아들,
게다가 경제적 능력없는 아빠에,
강아지까지 더해지니
엄마가 할 일은 태산같이 쌓여 있는데
퇴근해 와서 강아지의 똥을 치우고,
강아지의 밥을 챙기고,
강아지를 목욕시키고,
엄마에겐 너무나 가혹한 업무량이었던 듯 싶다.
그렇게 두세해를 공주와 함께 보냈고
나는 중학생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매일같이 날 반기던 공주가 사라졌다.
알고보니 아빠, 엄마가
우리에겐 말 한마디없이
공주를 지인에게 주기로 결정을 했고
이미 보내버린 이후라고 했다.
너무 속상했다.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내 방에서 찔끔찔끔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난다.
엄마, 아빠에게 말해봤자
해결되는건 없었으니까
나는 내가 얼마나 속상하고,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슬픈지
티조차 내지 못했다.
그냥 방에서 애써 눈물을 참아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공주는 2~3년만에 곁을 떠났고
이후 공주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달 후 들려온 공주의 소식은
'집을 나가 잃어버렸다.'
였다.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그래도 잘 지내길 바랐는데
어디 길을 헤매며
교통사고나 당하지 않았을지.
게다가 집에서 강아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산책 한번 못해보고,
제대로 사랑받지 못해
가족 이외에는 엄청난 경계를 보이는 아이라
누군가가 발견하더라도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긴 힘든 성격의 아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공주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엄마, 아빠의 결정이었지만
그 결정에 찍 소리도 하지 못한 내가,
어차피 내 의견을 반영되지 못할 것이기에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한 내가
너무너무 미웠다.
나는 공주에게 그렇게 죄인이 되었고
평생을 그 죄책감 속에 살았다.
딱 한장 남아있는 공주의 사진을
나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들여다 보지 못한다.
너무 미안해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내가 너무 한심해서.
어렸기에 가정에서 어떠한 힘도 낼 수 없었던 내가,
너를 지켜낼 힘이 없던 내가 너무 미안해서.
죄스러워서.
대신 여전히 나는 가슴속에 공주를 묻어놓고
나의 닉네임에, 아이디에,
곳곳에 공주의 흔적을 남겨놓고
기억에서 잊지 않으려,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나의 예민함을 묵살하곤 했다.
그렇기에 나의 예민함은 어쩌면 쿨함으로 발현되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쿨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타인들은 내게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내가 쿨해서 좋다 했다.
작은 말에 상처받지 않고 담대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씩씩하고 자신감있게 해나가는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사실은 너무나 예민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작은 감정변화도 실시간으로 캐치해낸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신경쓰고 있다.
작은 말,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일일히 신경쓰며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내 식대로 추론을 해버린다.
그렇다보니 추론에는 오류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예민했지만
나의 예민함을 수용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리고 예민함을 드러내봤자,
내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울어도 해결되는 것은 없었고
아무리 소리쳐도 나의 예민함은 묵살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예민하지 않은 척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겉으로는 쿨한 사람이 되었다.
담대하고, 상처받지 않고, 씩씩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남들이 정의한 나의 성격은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기질은 예민했다.
그리고 그 기질이 수용되지 않으니
나의 성격에는 수많은 모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질은 예민한데,
수용받질 못해 나는 그 반대의 성격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예민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는 예민한 내가 좋다.
타인의 감정을 세심하게 캐치해 내는 내가 좋다.
아이의 불편함을 놓치지 않는 내가 좋다.
예민하기에 나타나는 크나큰 감정의 파도가
상담공부를 하며, 육아를 하며, 글을 쓰고, 상담사가 되는데 있어서
하나의 큰 강점으로 작용하곤 한다.
나는 세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곤 한다.
슬픔도, 아픔도, 행복도, 기쁨도.
남들보다 더 선명한 화질로,
남들보다 더 풍부한 사운드로,
나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예민한 내가 참 좋다.
이 예민함으로 나는 타인들의 공감을 끌어내곤 한다.
이 예민함으로 나는 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예민함으로 나는 아이의 예민함도 더 잘 수용할 수 있다.
이 예민함으로 나는 나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엄마, 나는 예민한 아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