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땡이는 현재 입원중이다.
아이의 방학 2주,
그리고 입원 1주
나는 총 3주간 아이와 함께 하고 있다.
방학동안 친정에 가 있었지만
친정 식구 모두 일을 하기에
아이와 내내 둘이서 붙어 다녔고,
입원해서도 일해야 하는 아이아빠를 대신해
나 혼자서 독박육아를 도맡고 있다.
그리고 내가 성장한건지,
팔땡이가 성장해서 편해진건지,
어린 시절 입원했을때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입원을 받아들이고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24시간 붙어 지내는 생활이 오래 이어지다보니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아이와 하루 몇시간 붙어 있을때와 달리
아이와 나는 감정의 풍파를 하루에도 수십번씩 겪고 있다.
아이뿐이랴,
친정이든 시댁이든 남편이든
누군가와 오래 함께 한다는 것은
크나큰 감정의 풍파를 가지고 오곤 했다.
예전엔 아이로 인한, 혹은 관계에 의한
이 감정의 파도가 너무 버거웠다.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이고 싶은데
아이와 24시간 붙어 지내니
감정의 파도는 하루에도 수십번 격변하며 요동쳤고, 나는 그러한 감정에 동요되어 그 감정을 겪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순간부터 아이와 단 둘이 지낸다는 것이 내겐 매우 두려운 시간 되어 버렸다.
식중독에 걸린 아이는 일주일전 입원을 했다.
아이와 나는 단둘이서 병동에 갇힌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입원해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상호작용했고, 그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감정은 핑퐁핑퐁 서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주거니 받거니 교차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아이와 나는 서로 끔찍이도 좋았다가, 또 나빴다가, 웃었다가, 또 울었다가, 즐거워하다가 화냈다가 여러 상황과 감정이 오고 갔다.
예전같았으면 이 감정의 풍파가 나는 매우 부담스러웠을거다.
아이의 감정에 압도되어 그 감정으로 벗어나고자 혼자만의 시간을 갈망했을 것이다.
아이의 감정에 어찌 대처할지 몰라 내 감정은 더욱더 큰 폭발을 일으키며 아이을 함묵시키고, 아이의 감정을 차단해 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와 아이는 7년이란 시간동안 성장했고,
아이의 감정이 격변하는 순간이면, 나는 조용히 아이의 감정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감정을 찬찬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격변의 원인은 대부분 나였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아이에게 명령하듯 말하거나, 따지듯 말하거나, 혹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아이 탓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때면 아이의 감정이 미친듯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아이의 감정에 조용히 집중하고 감정을 너울너울 타고 있자니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해하고, 함께 느끼고, 보듬었다면 좋았을테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반응이 자동화되어 있진 않나보다. 더 수련해야지.)
내 잘못은 하나도 없고, 아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나는 오목조목 따져들었고(화나 짜증은 일절 없었으나) 아이는 자신이 잘못한걸 알지만 엄마가 따져 물으니, 또 탓을 하니 기분이 팍 상해버렸던것 같다.
짜증을 내고 울음을 보이고 화를 내는 아이에게 "니가 잘못한건데 왜 화를 내?? 화낼 사람은 나 아니야?" 라고 물었고, 아이에게 울음이 멈추고나면 대화를 해보자는 제안을 하며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나 역시 생각을 정리하고, 아이의 감정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나의 태도가 문제였음을 직시했다.
남편과 싸울때에 남편은 내 감정은 모두 배제한채 요목조목 따지고 들며 옳은 말을 할때가 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을 수긍하고 인정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내 감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니 감정은 됐고, 모르겠고, 중요치 않고' 라는 말이 남편의 말에 선행하여 생략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곤 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에게 퍽 미안해졌다.
아이의 감정을 읽기 전에, 옳고 그름을 말하고 있었구나.
아이에게 네 잘못을 지적하고, 잘못했기에 넌 짜증내면 안된다. 라는 잘못된 생각을 은연 중 전달하고 있었다.
감정은 정답이 없거늘.
내가 느낀게 정답이고, 네가 느낀것이 정답임을.
나는 아이가 내는 짜증이 오답인양 반응했다.
아이의 짜증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아이는 이내 울음을 그쳤고 우리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엄마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니 마음을 알 것 같아. 팔땡이가 잘못한 행동을 했지만 좀 더 좋게 말할 수 있었는데. 맞지?
잘못했어도 탓하듯이 따지듯이 말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엄마가 옳은 말을 했지만 네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해서 네가 기분이 나빴던거 맞아?"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
"엄마가 실수했네.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네 마음을 잠시 잊고 생각하지 못했나봐..
너 우는 동안 나도 조용히 생각해 봤는데...
아빠랑 어제 싸울때, 아빠가 엄마한테도 옳은 말 하면서 따지고 들고 엄마 탓하듯 말을 해서 기분이 엄청 나빴거든.. 근데 그 행동을 내가 너한테 똑같이 했나봐. 네 마음을 잠시 잊어서 미안해."
하며 아이를 꼭 안아주자 아이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짜증을 멈추었다.
아이와 나는 함께 붙어 지내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다.
아이의 감정을 상하게도 만들었다가, 상처도 주었다가, 어떤 때는 처참할 정도로 화를 쏟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과정들이 옳은 길로 가기 위한 시행착오로 다가온다.
결국 모든 부모는 아이에게 많은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지만, 그럼에도 모든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목표를 가지고 육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이와의 시행착오에서 또 한번의 깨달음을 얻는다.
아이를 통해 또 한번의 가르침을 받는다.
나는 오늘도 아이를 온전히 믿어주지 못했다.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 탓을 해버렸다.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 옳고 그름만을 강조하며 아이를 압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지난날 비슷한 상황에서의 나의 감정을 떠올렸고, 아이의 감정을 역지사지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오늘 오전, 나는 아이에게 문득 "실패나 실수는 해서는 안되는 걸까? 안좋은 걸까?" 를 질문했었다.
전날 액체로 된 불량식품을 먹은 아이가 맛이 없다며 실수로 물티슈에 뱉어버렸고, 액체이기에 그대로 물티슈를 타고 흘러내려 아이의 옷을 다 젖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오늘 그걸 또 먹고는 맛이 없다며 음식을 뱉기 위해 종이컵을 찾는 아이를 보고서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앞뒤 맥락도 없이
뜬금없이 질문을 던진것이었다.
아이는 대답했다.
"아니?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실수해도 되지!"
연이어 내가 말했다.
"맞아, 실수하고 실패하고.. 무수히 많은 실수와 실패 속에서 우리는 배우게 되고, 다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고, 더 잘하게 되는거잖아.
봐봐! 너 어제 실수로 물티슈에 액체 뱉어서 다 젖었었는데, 오늘은 물티슈에 안뱉으려고 종이컵을 찾고 있어!"
이젠 아이와의 시간이 두렵지 않다.
아이의 격변하는 감정이 두렵지 않다.
그리고 나의 격변하는 감정 역시도.
이제야 아이의 감정에 동승하여 너울너울 파도타는 법을 알았고,
아이와 상호작용하며 겪는 감정의 핑퐁이,
설령 그것이 부정적이거나 폭발적이거나
내 선에서 이해가지 않는 감정일지라도
그것이 아무 이유도 없이 온 것이 아님을,
이 또한 내게 무언가를 남길 것임을 알기에
편안하게 아이의 감정을 느끼고 반응하고 음미할 수 있을것 같다.
물론 화내고, 싸우고, 짜증내고, 울고불고
우리 사이에 수많은 시행착오가 오고 가겠지만
이 또한 우리에게 교훈을 남길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