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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Jul 12. 2022

너는 너의 바운더리를 지켜, 나는 내 바운더리를 지킬게

가족에게 상처 한 번씩은 받아 봤을 것이다. 아니, 한 번이 아니라 사실은 마음속 깊은 상처의 대부분은  가족으로부터 받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혈연으로 진한 게 묶인 가족이라는 이름은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게 되면 흰 옷에 묻은 붉은 혈흔처럼 깊고도 진하게 남는다. 어지간한 약으로는 치유하기 깊은 힘든 상처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가족들 대부분은 충격에 빠졌다. 시부모님께서는 요새 보기 힘들게 아들 결혼의 시작을 조금 더 쉽고 편하게 가라고 좋은 집을 사주셨다. 그런 만큼 아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매우 크셨기에 아들이 집을 그리 쉽게 날려먹고 빚더미에 앉았다는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아버님은 '달팽이도 집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말을 하셨다. 며느리인 나로서도 참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게다가 본인 혼자 사는 집도 아니지 않은가. 갓 태어난 저 핏덩어리 쌍둥이를 데리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도 앞이 막막했으니.. 일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시며 어렵게 가정을 일구시고 그 와중에 집도 사시고 4자녀 모두 대학에 보내어 키워내신 누구보다 성실하신 시부모님이시다. 어떤 말을 해도 달게 들어야 마땅할 일이다.


친정에서도 놀라긴 마찬가지셨으나 직접 당한 사위의 마음은 오죽할까 하여 무작정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안타까워하실 뿐이었다. 양가 부모님 모두 사건의 크기에 비해 우리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보다는 삶을 살다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겪을 수 있다는 식의 위로와 힘을 주셨다. 특히 어머님은 아들이 다시 일어서기만을 바라며 그때부터 새벽예배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시며 새벽마다 기도를 하셨다. 아무리 피곤하셔도 새벽 4시가 지나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예배를 가셨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탈없이 사는 것은 다 어머님의 기도 때문이리라.


우리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큰 누나 댁의 매형의 말이었다. 현직 교사로 강직하시면서 FM적인 사고를 지니신 매형에게 처음부터 '주식', '투자'이런 종류는 모두 불로소득이나 일확천금, 이런 단어와 연결되었다. 사건을 접하고 처음 시댁 가족이 모였을 때에도 평소의 성격 그대로 거침없는 말을 쏟아내셨다.


'너는 너의 바운더리를 지켜, 나는 나의 바운더리를 지킬 거야'


바운더리. 경계선이라는 의미다. 남편에게 '바운더리'라는 말을 100번쯤은 한 것 같다. 여기서 우리가 큰 누나 댁에 도와 달라고 한 적은 전혀 없다. 10원 한 장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고 그동안 도움을 받았던 적도 없다. 맏이 댁으로서 해야 할 말이라고 하기엔 나에겐 너무 상처가 되었다. 아버님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과 새벽이 되도록 주방에서 얘기를 하였는데 대부분은 매형의 훈계의 장이 되었다.


매형의 한결같은 이런 투의 말은 후에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도 계속되었다. 아버님은 급성 패혈증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망하고 나서 인지라 장남인 오빠는 친구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얼마나 황망한 마음이었을지... 며느리인 나도 아버님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보내드려 너무나 죄송하고 한이 되는데 당사자인 남편은 어땠을까?.. 아버지의 영정 아래에서 취기가 올랐는지 매형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남편에게 거의 욕설을 섞어 가며 비난을 하였다.


아버님의 영정 아래 그곳에는 매형과 남편, 어머님이 있었고,  그 옆 작은 방에는 쌍둥이를 재우고 있는 내가 있었다. 매형의  연설과 훈계가 계속 이어졌고, 얇은 벽 사이로 그 비수 꽂은 말들은 남편뿐만이 아니라 내 귀에도 또렷이 들려왔다. 장례식이고 뭐고 다 뒤집어엎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한 없이 죄송한 건 백번 옳으나 지금 여기에서, 굳이 지금, 아버지를 여읜 남편에게 꼭 그렇게 해야 했을까? 누구보다 죄책감을 많이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은 묵묵히 그 모든 말들을 듣고 있었다.


이 일을 겪고 나는 우리에게 돈을 채근하는 채무자들보다도 가족의 일원인 매형으로부터 더 큰 상처를 받았다. 나에겐 거의 트라우마 수준이었다. 남들에게 받는 상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열심히 살아서 매형이 그렇게 말한 '내 바운더리 안에서 반드시 일어나 보자'라고 결심했다. 몇 년 동안은 그때 받은 충격과 수치심 때문에 시댁 모임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가족 모임도 되도록 피해서 갔다.


한 두 살 더 나이를 먹어가며 내 마음 그릇이 넓어졌는지 조금씩 매형도 이해가 되었다. 그분의 세상에서의 시야로 바라보면 우리는 집안 말아먹을 사람으로 보였을 수 도 있다. 그 후에 매형은 남편에게 사과도 하셨다. 하지만 사람 마음에 한번 꽂힌 비수는 그 비수를 뽑아내도 자국이 깊이 남는 모양이다. 매형의 혹독한 말들은 내가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도록, 누구보다 성실히 살아서 가정을 안정화시키자는 또 하나의 동기부여가 되었다.


'바운더리를 지킨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바운더리를 지키는 것에 너무 동감한다. 사람이 너무 격이 없이 가까워도 문제가 되는 것을 많이 보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다. 적정선의 거리감이 좋다. 하지만 나는 그 바운더리를 넘어 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있다면 금전적이든 정서적이든, 다가와주기 원하는 그 누군가에게 그 바운더리를 넘어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가 오고 폭풍우가 몰아쳐 작은 새싹은 물에 잠기어 죽은 듯이 보이나 곧이어 햇살이 비추면 그 모든 수분과 영양분으로 일어나듯이 우리 쌍둥이 가족의 새싹도 지금은 죽은 듯이 보이나 세포 하나하나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곧이어 폭풍성장의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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