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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Aug 16. 2022

드디어 4 가족이 함께 살게 되다

월세 40만 원의 오래된 1층 아파트, 그곳은 나에겐 천국이었다.

시댁에서의 일 년은 생각보다 다사다난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있었다..(덕분에 지금은 정신적으로 매우 가깝다.)

남편은 아이들 어린이집 버스운전을 2~3개월 하다 이내 친척이 하는 건축업체에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게 된 계기는 이렇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친척 중에 사업을 크게 하시는 분에 대해 얘기를 해주셨다. 그는 젊어서 돈을 많이 벌어 당시 그 지역에서 처음으로 부의 상징인 각그랜져를 몰았던 분이다. 그런데 사업이 갑자기 부도가 났고,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운 중에 우리 어머님께 도움을 청하셨다. 어머님께서는 당시 돈으로는 꽤 큰 금액인 삼천만 원을 흔쾌히 빌려주셨고, 그분은 어머님께 빌린 돈과 여기저기서 모은 돈을 가지고 도망치듯 아프리카로 떠나셨다. 그리고 영어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떠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엔진오일필터 등 자동차 부품을 팔아 사업을 성공시키셨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건축사업을 시작했고, 지금은 안정적으로 사업을 이어오시고 계신다고. 

가방끈도 결코 길지 않은 실력으로 맨땅에서 영어를 배워,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신 그분의 얘기는 나의 온 신경 세포를 집중시켰고, 나의 마음을 감동으로 가득 찼다. 

'위인이다~!' (나는 이런 분들을 평소 위인으로 칭한다.)


이 때문에 그분은 어머님께 항상 감사해하고 가끔 명절 즈음 어머님께 인사도 오신다.


'이거다~!'  '그 위인을 꼭 만나야 한다~!'

사람은 어려울 때 도와준 그  한 사람을 반드시 기억하게 되어있다. 어려울 때 어머님의 도움을 받아 힘든 시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분명 지금 우리에게도 뭔가 도움이 될 것이다. 내심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주겠다(?)는 혼자만의 어이없는 상상을 하며 김칫국을 마셨다.   


그 이후 그 위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으나 나만큼 시어머니와 남편은 크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그분을 한번 만나고 오라고 재촉했다. 며느리의 간청에 못 이겨 시어머니와 남편은 어느 주말에 드디어 길을 나섰다.


하루 종일 집에서 기다리던 나는 '시간이 왜 이리 더디 가는지', '무슨 얘기가 있었을까' 상상하느라 혼자 분주한 마음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여러 갈래로 펼치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와 풀어놓은 이야기.

사업처에 마침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던 차였고, 사람을 구해도 얼마 못 버티고 떠나기 일쑤여서 사람 구하는 게 항상 어렵다는 것. 그러니 남편에게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고.


'왜 아니 되겠습니까~!' 나의 김칫국은 현실이 되었다. 기뻐서 내적 환호성을 연신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동안 안되기만 했던 일들이 머리를 스치며 이 순간부터 바닥을 찍고, 상승 전환을 하는 신호 같았다.  

그렇게 남편은 건축업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나의 기쁨과는 대조적으로 남편은 마냥 좋지만은 않은 듯하였다.

"다른 일을 알아보면 어떨까?" 하며 설레는 나에게 찬물을 끼얹듯 딴 얘기를 하기도 하였다.  

남편이 꺼려하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거리가 있어 주말 부부를 해야 하고, 모르는 분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고, 한번 시작하였으면 다른 곳처럼 마음에 안 든다고 바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게다가 정말 친한 친척도 아니고, 남편은 그분을 대학교 때 잠깐 보고 처음 보는 것이라 하였으니 어렵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친정에서 얹혀살 때도 주말부부를 했고, 거기서 나는 엄마 식당일을 도우며 떡볶이 장사를 해가며 쌍둥이 육아도 다 해냈으니 괜찮다고. 물론 친정엄마에서 시어머니로 바뀐 것은 엄청나게 큰 변화다..

이것은 기회고, 여기서 죽이 되든 밥이 되는 배워야 한다고.

'걱정 말고 우선 시작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만두라'라고 얘기하며 남편을 다독였다.

그렇게 남편은 주중에는 2시간 가까이 떨어진 건축자재 회사에서 일을 하였고, 주말이면 돌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는 동안 나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평일에는 아침 일찍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8시 30분까지 출근하여 건축회사 일을 하고, 5시 30분에 퇴근하여 아이들을 픽업하였다. 그 후에는 시어머니와 아이들 식사를 챙기고 아이들 씻기고 빨래며 각종 살림들 정리하고, 아이들 재우고.. 쉴 틈 없이 평일이 지나갔다.


어쩌다 보니 우리 둘 다 건축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건축 자재를 수입하여 파는 일을 하였고, 나는 건축 사무 업무를 보면서 일련의 건축과정을 눈으로 보고 맨 땅에서 건축물이 올라가는 동안,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공정의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앞 선 글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처음 사업이 실패하여 들어간 회사 역시 건축 입찰 관련 회사였다.  




우리의 첫 사업이 망하고, 다급해서 닥치는 대로 했던 보이지도 않던 작은 조각들은 점점 눈에 보이는 형태가 되어갔다. 그리고 나중에 이 조각들은 합쳐져서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데 결정적인 사업 아이템이 되었다.


남편은 처음 2개월간은 힘들어했다. 건축업계 사람들의 특유의 거침이, 뭐든 부드럽고 상냥한 남편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달이 바뀔수록 남편 특유의 수 감각은 살아나고 있었다.


처음에 펀드 관련 일을 했기에 남편은 돈과 수에 대한 개념이 심하게 빨랐다.

'얼마에 사고 얼마에 판다'

는 그야말로 남편의 전매특허다. 남편은 곧이어 수많은 자재에 대한 매입단가와 매출단가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가격 협상의 달인이 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남편의 부드러움과 상냥한 성격은 나중이 되자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사람들이 자재를 사러 와도 상냥하게 인사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대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남편만 찾게 되었고, 개인 번호로 밤이고 휴일이고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출고를 많이 담당했는데 점점 영업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 위인 분도 이제 믿고 맡기는 입장이 되었다.


완성된 건물


그즈음 나는 건축 아저씨들과 사계절을 보내며 그곳이 더없이 편해졌고, 허허벌판이었던 곳이 변화하여 멋진 건축물과 함께 아름답게 변화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마치 내가 지은 것 같은 애정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카리스마와 야생미 뿜뿜한 아저씨들을 대하다 보니 이제 어떤 사람을 만나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건축회사 계약이 끝나갈 무렵,  남편도 어느 정도 회사일이 손에 익었고, 본인이 일하는 회사가 편해져 우리를 데려가기에 충분한 마음의 여유와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는 사업이 망하고 신혼 아파트에서, 원룸인 듯 투룸 빌라로, 그곳에서 또다시 친정으로 얹혀살기, 시댁에 얹혀살기를 거쳐 드디어 온전히 4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부루마블에 진심인 2호


월세 40만 원의 오래된 1층 아파트. 그곳은 나에겐 천국이었다.


오래된 1층의 확장 아파트라 시베리아 벌판 추위에(수족냉증인지라..) 롱 패딩을 입고 살았지만 가족이 매일 함께 눈을 뜨고, 저녁을 먹고, 티브이를 볼 수 있음에 행복했다. 다 함께 도란도란 마트에 가는 것도 나에겐 백화점 명품 쇼핑을 하는 것처럼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남들의 일상이지만 나는 그렇게도 바라던 꿈이었다.


한동안은 그냥 밥만 먹어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엄청난 부자라도 된 듯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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