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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Aug 22. 2022

남편의 허리디스크,  퇴사에서 창업으로

전화위복이란 이럴 때  

남편은 고질적인 허리디스크가 있다.

허리디스크가 생긴 계기는 남편의 군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때 '푸른 거탑'이라는 시트콤 같은 군대 드라마를 재미나게 시청한 적이 있다. 최근에 나온 정해인 주연의 넷플릭스 D.P라는 작품도 시즌 2를 기대할 정도로 재미있게 봤다. 군대라는 공간은 남자들로서는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스토리들을 하나씩은 만들어내는 스토리 공장 같다. 남편의 허리디스크는 바로 그 군대 스토리 중 하나에서 연유했다.



보통은 '선임에게 얼차려를 받다 생겼나?' 생각하기 쉽지만, 남편의 경우는.. 간단하게 말해 똥을 푸다 허리가 나갔단다. 남편은 각 부대를 돌아다니며 인분을 퍼 나르는 운전병이었다.(물론 똥만 나르지는 않았고, 사람도 날랐다.) 호스를 똥통에 넣고 빨아들이는데 똥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던지 그 똥을 푸다가 허리가 나갔다고 한다. 어이없는 얘기에 지금도 실화인가 싶지만, 어찌 됐건 그렇다.




그 일로 신혼 때부터 허리가 좋지 않아 병원에 다니기도 하고, 생활하면서도 허리에 무리가 가는 행동은 최대한 주의하며 지냈다. 그런데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무거운 건축자재들을 상차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고, 주문이 몰릴 때는 하루 종일 상차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허리 아픈 날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휴일 저녁, 아이들과 피자를 먹으며 한가로이 영화를 보는데, 남편이 피자 한 조각을 먹다가 갑자기 그대로 땅에 꼬꾸라졌다. 그리고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 마냥 몸을 부르르 떨며 움직이질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평소에 개그맨 못지않은 장난기가 항상 내재되어 있는 사람인지라(이런 동작을 많이 봐왔기에..) 처음에는 장난일 줄 알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정말 꼼짝도 못 하고 '으~~ 으~'하며 이상한 소리까지 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하고 정신을 차려 급히 119를 불렀다.


당시 아이들은 유치원생이었는데 상황이 너무 급해서 맡길 사람도 구하지 못하고,

"아빠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올게~!

둘이 눈 감고 자고 있어~ 절대 어디 나가면 안 돼~!"

하고 아이들을 방에 뉘어주고는 이불을 던지듯 덮어주고 그대로 119차에 올랐다. 이동하는 구급차 안에서도 남편은 매 초마다 극심하게 아파해서 보는 나도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그렇게 응급실에 가서 일반 진통제를 맞았는데 효과가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야 진통이 가라앉아 새벽이 되어 간신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히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이불에 오줌을 싸 놨지만.. 자기들 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다음날 급하게 서울의 허리 전문 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았다.


그 일로 인해 너무 놀랐던 우리는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을 해야 했고, 그러려면 남 밑에서 일하는 것 말고 우리 일을 해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렇게 남편의 허리디스크 치료는 자연스레 퇴사의 결심과 창업의 결정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남편이 하던 일 그대로 건축자재를 팔기로 하였다. 다행히 그동안 성실하고 깔끔하게 일 처리를 잘 해왔던 남편은 우수한 매입처를 몇 군데 확보할 수 있었고, 맨 땅에 영업을 하여 매출처를 늘려갔다.

우리는 창업비용도 없었기에 살고 있는 집에 사업자를 내고, 서류 작업과 각종 사무업무는 내가 맡아서 하고 남편은 밖에서 영업을 담당했다.



취급하는 외벽 자재 - 세라믹사이딩


처음 시작은 불확실함과 조마조마함의 연속이었다. 버젓한 사무실도, 명함도 없는 우리에게 단가가 비싼 건축자재를 덜컥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전화로, 방문으로 열심히 영업을 해도 퇴짜를 맞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불안함으로 더욱 위축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영업의 수를 늘려 성공의 확률을 늘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신뢰할 만한 보이는 형체가 없었기에 무엇보다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신뢰를 얻으려면 상품에 대한 전문성과 남편의 진실된 사람됨이 보여야 한다. 다행히 남편은 다니던 건축회사에서 건축자재뿐만이 아니라 시공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고, 확보한 매입처 또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곳이었기에 처음은 힘들었지만 곧이어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고, 꾸준히 매출처를 확보해나갈 수 있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첫 거래는 어려웠지만 거래를 한 번 하고 나면 어김없이 우리를 찾는 업체들이 많아졌다. 만족한 업체와 건축주들은 주변에 소개를 해주기도 하였다. 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아쉬울 게 없는 큰 업체에서는 귀찮고 까다로운 주문건이나 진상 고객은 그냥 넘기기도 할 테지만, 우리는 아쉬운 게 아주 많았기에 까다로운 주문과 진상고객들도 최선을 다해 대했다. 그러자 하나 둘 고객이 늘어났고, 고객이 늘어남에 따라 주문 상품이 다양해져서 매입 품목을 늘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취급하는 외벽 - 요즘 많이 찾는 네츄럴우드 외장
취급하는 수입 기와 - 스페니쉬 S형 마자론 미디발 기와


건축자재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우리는 외벽, 지붕, 부속품 뿜만 아니라 취급하지 않는 자재 주문이 들어와도 전국을 수소문하여 팔았다. 기꺼이 '홍반장'이 되어 고객들이 전화 한 통이면 편하게 공사현장까지 원하는 자재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직접 시공문의까지 들어와서 시공업자들을 섭외하여 시공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블로그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블로그를 통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문의가 들어와 계약을 하기도 했다.


전원주택 시공 / 외벽 - 세라믹사이딩


그러는 사이 우리는 또 한차례 이사를 갔다. 이번에는 1층 구축이 아니라, 그보다는 살짝 좋은 11층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였다. 바닥에만 살며 항상 커튼을 닫아놓고 살다가 10층을 위로 올라가니 이제 시원하게 커튼을 열어둘 수 있었다.

처음으로 뻥뷰를 맛보고,

'이래서 사람들이 높은 곳에 살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커튼만 열어놔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니 집 밖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뭔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여기까지가 대략의 현재까지의 이야기다.

뭔가 큰 성공을 기대했다면 어쩌면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성공신화에 나오는 온갖 역경을 견디어 내고 크게 성공하여 돈 걱정 없이 사는 성공한 사업가는 아직 아니다. 지금도 역경 중에 성장하고 있다. 아마 그런 신화적이고 멋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나이도 더 먹어 있겠지. 사실 글도 그때 더 멋진 나의 모습으로 쓰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드시 크게 성공해야만 어려운 시절마저 아름답게 그려져서 다른 사람에게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외형적인 경제적 부의 측면보다는 어려운 시절을 통해 성장한 정신과 사람에 대한 사랑, 이해를 더 나누고 싶었다. 오히려 화려한 성공보다는 현실에 있을 얘기들이 누군가에게는 더 위로가 되지 않을까?




숨이 막힐 듯한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며 갖게 된 버릇, '왜'?


힘든 시간들을 지나고 갖게 된 버릇들이 있다.

독서, 생각, 운동, 인내심, 깡.

그리고 '왜?'라는 단어.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능동적이라는 뜻이다. 전에는 나를 귀찮게 하는 모든 문제들이 말 그대로 귀찮을 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는 것은 귀찮음을 포기하고 관련 문제들을 풀기 위해 고심하고, 사람을 접촉하는 등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이유를 묻지 않고 무관심한 게 단기적으로는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삶을 바꿀만한 문제가 생기니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등의 기본적인 것부터 이유를 끊임없이 묻고 찾았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어려움의 터널을 지나며 시시콜콜한 작은 것부터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왜?'라는 질문을 달고 사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이유를 찾고 찾았다면,

 '그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세트가 된다.  

이 두 개의 질문을 가지니 생각하는 버릇, 고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예전에는 없던 버릇이다. 그런 습관들은 자연스레 닥친 문제의 해결이나 사람 관계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분노도 해보고, 우울증과 불면의 시간도 보내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 소용없었다. 오히려 신경 쇠약으로 건강만 해칠 뿐이고 가족 분위기도 초상집으로 만들 뿐이다.


그러는 대신 나의 능력 밖의 일이나 시간이 필요한 일에는 조바심을 내지 말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때론 시간이 가야 해결되는 일들이 있다. 그런 시간들이 모여지니 건강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업에 대한 생각도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업도 결국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기에 사람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며,


나는 어려운 시절을 겪고 가까운 사람에게 돈 독촉도 당하며, 살던 집 보증금도 내어주고, 가족에게 버림받는 취급도 당해보고, 사람이 돈 앞에서 얼마나 냉정할 수 있는지 경험했다.

그리고 돈만 따진다는 것이 속물이 아님을,

돈이 있고 없음에 가족이 함께 살고 흩어질 수 있음을 체험했기에 나에게 돈은 정말 소중하고 눈물 나는 것이다. 앞으로도 돈이 없어 서러움을 겪지 않도록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 것이다. 더불어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주변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사랑하고 존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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