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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Aug 01. 2022

트럭을 모는 그녀, 건설현장에서 살아남기

더부살이 시즌2 : 이번엔 시댁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시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삿짐센터를 부를 것도 없이 그냥 몸과 옷가지만 가지고 간다. 이미 시댁에는 어머님의 오랜 살림살이들이 차고 넘쳐났기에 우리 집 물건을 들여놓을 공간도 없었다. 이사를 다닐수록 이삿짐이 점점 가벼워진다. 신혼에 거창하게 준비했던 새 물건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상처가 나기도 하고, 이동하기 곤란하여 두고 오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물건에 대한 집착이나 욕심이 얕아지는 듯하다. 실제 지금은 더욱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비싼 돈 들여 구매한 물건들도 때론 짐이 되기도 한다는 걸 깨닫고 나니 구매를 할 때도 꼭 필요한 물건인지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우리 방을 꾸미고 나니 가끔씩 오던 시댁이 정말 내 집과 같이 느껴졌다. 곧이어 쌍둥이들 어린이집에 등록을 하고, 얼마간은 돌아가신 시아버님과 관련된 정리를 하느라 시간을 보내었다.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남편과 나는 되도록이면 빨리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고향이 좋은 이유는 모두 아는 사람이라 일자리도 소개가 많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애들 어린이집 원장님도 남편의 선배 내외가 운영하는 곳이다. 


마침 어린이집 버스 운전기사가 그만두어 운전기사를 찾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작은 마을에서 대형면허를 가진 사람이 이제 곧 이사를 온 우리 두 부부뿐이었다. (나도 여자로서는 특이하게 대형면허가 있다. 버스 모는 여자다..) 급한 대로 남편이 아이들 어린이집 버스를 운전을 하게 되었다. 해맑은 쌍둥이들은 아빠가 운전해주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다고 자랑하며 그저 기뻐했다..


곧이어 나에게도 시어머니의 친구분이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하게도 시골에 젊은 사람이 들어오면 바로바로 소개가 일어난다. 사랑방 아줌마들의 입소문은 요즘 핫한 sns도 못 이기는 참으로 신묘한 전파력이 있다.


내가 가게 된 곳은 발전소의 경비실 신축공사현장이다. 신분증 확인과 차량등록을 하고야 들어갈 수 있는 발전소는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모든 곳이 차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넓다. 앞으로 내가 있을 곳은 공사현장 바로 옆의 컨테이너 한 칸. 그 안에서 공사와 관련된 사무일을 보며, 공사에 필요한 인력들의 입출입을 관리한다. 원래는 10개월 계약이었던 것이 공사가 지연되어 1년 여간을 일했다. 앞으로 이 작은 컨테이너에서는 공정에 따라 덤프트럭, 살수차, 포클레인 등 건설기계 운전자, 형틀/철근 목수, 동바리/ 비계 작업자, 신호수, 미장 업자,  경계석 업자, 유리, 잡철 등 다양한 업종의 아저씨들과 매일같이 시트콤이 벌어지게 된다. 


발전소는 보안이 중요한 곳이라 입출입이 까다로운 편이다. 이 때문에 건설사 측과 발전소간에 주된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공정에 맞게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는 공사현장과 안전관리 규칙 하에서 원리원칙대로 공사를 진행해야 하는 발전소 측과 매일같이 신경전이 벌어졌다. 또한 안전모와 안전띠를 무조건 착용해야 하는데 실제 일용직 아저씨들은 그런 거를 너무 싫어한다. 일하는데 걸리적거린다고만 생각하시는 게 일반적이다. 발주처가 발전소처럼 공공이 아닌 민간이었을 때는 다소 자유롭게 일하기 때문에 그 버릇이 이어지는 것이다. 가끔 티브이에서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사고가 발생하는 뉴스가 나오곤 한다. 예전에는 발주처의 관리감독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일해보니 작업자의 부주의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전소 측에서도 순찰을 돌다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일들 (안전교육을 받지 않고 현장에 바로 투입되거나, 안전모와 안전띠의 미착용,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 부적절한 행위 등등)을 목격하게 되면 바로 컨테이너로 들어와 현장소장님께 다다다~지적의 총질을 난사한다. 나는 옆에서 컴퓨터에 눈을 고정시키고 뭔가 열심히 하는 체하며 귀로는 초정밀 보청기라도 낀 듯 작은 소리 하나까지 귀에 담아놓는다. 살벌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생명이다. 발전소 측의 지적도 너무 이해가 되는데 야생마 같은 일용직 아저씨들을 통제하기가 생각보다 정말 쉽지 않다. 게다가 매일 오는 인부들도 아니고 일용직 인부들이 대부분이라 날마다 바뀌는 사람들을 통제하기가 더욱 쉽지 않았다.


이때 발전소 측의 마지막 협박으로 계속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공사를 중지시킨다고 하면 그때부터 현장소장님은 뚜껑이 제대로 열려 반항아도 돌변한다. 이쯤 되면 나의 초정밀 보청기도 필요 없어질 정도로 언쟁이 커지고 팔을 여기저기로 휘저어 대는 등 액티브한 모션도 등장한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소장님은 발전소 측으로부터 받았던 따발총을 안전부장님(건설사 측 안전관리 담당)께 2배로 쏘아대며 일장연설을 시작하신다. 그러다가 결국 안전부장님은 발전소 측과 현장소장님의 쌍 따발총에 못 이겨 소장님과 대판 싸우더니 그다음 날부터 나오지 않으셨다.


이때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하였다.    


빛나는 아우디를 타고 멋지게 등장하시는 사장님(우리 측 건설사 사장님)은 사태를 보고 몇 개월 남지도 않았는데 안전부장을 새로 뽑기도 힘들지 않겠냐 하신다. 결국 안전부장님이 하시는 일은 소장님과 내가 나눠서 하게 되었다. 어휴.. 답답하게 일을 해도 그래도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 편했는데 이게 웬일이람..


그때부터 나는 차에 시커먼 아저씨들을 태우고 안전교육을 시키러 다니고, 검수를 받아야 하는 품목이 있으면 물건을 트럭에 싣고 본부에 가서 확인을 받아 왔다. 나는 왜소한 편이다. 160cm 정도의 키에 40kg 초반 정도로 남편은 나를 초등학생이라고 놀려대기도 한다. 왜소해서 어릴 때 말뚝박기 하면 제일 힘이 덜 받는 자리를 맡거나 기마전을 할 때도 위에 타는 역할을 주로 했다. 힘은 부족했는데 나름 날쌔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 작은 여자가 트럭을 몰고 아저씨들 단속 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시트콤이 따로 없다. 언제부턴가 소장님도 미안해하는 표정 하나만으로 나에게 일을 점점 맡기기 시작하고 스트레스받는다는 핑계로 점점 사라지는 횟수가 많아졌다. 발전소에서 순찰 나오는 시간이 되면 알람을 맞춘 듯 화장실에 가신다. 그러면 발전소 감독관은 나에게 말을 시켰다. 오늘 몇 명이 나왔고, 건설차량은 미리 출입허가를 받았는지, 안전교육은 받았는지... 나는 자연스럽게 출근하자마자 안전부장님이 하던 일을 꼼꼼하게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감독관님도 하소연을 하고 소장님도 하소연을 하고 들어 보면 두 측 모두 이해가 되었다. 어느새 나는 완충지대가 되었고 나름 피스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감독관님도 소장님에게는 쌀쌀맞게 대했는데 내가 측은했던지 상냥한 것 까지는 아니나 그래도 츤데레 느낌으로 대해주셨다.


건설사 사장님도 내가 트럭을 몰아 검수를 받아온 이후부터는 급격히 나에게 잘해주셨다. 대형면허는 언제 땄는지 물어보시고, (예전에 공무원 시험에 필요해서 대형면허를 따두었다.) 자신이 사업해온 이야기도 해주셨다. 사장님은 충청권에 DVD가 있는 모텔을 거의 처음으로 짓기 시작하신 분으로 건물도 여럿 지으시고 건설사업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신 분이다. 사업 초장기 얘기도 해주시고 본인의 집 얘기도 해주셨는데 대화도 잘 되었고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저씨들과 말이 잘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남들은 아재들과 얘기하면 지루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분들이 살아온 얘기를 듣는 게 좋다. 나 보더 먼저 인생을 살아오신 그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배울 것이 참 많이 있다. 아저씨뿐만 아니라 누구 와든 인생 얘기하는 것을 즐긴다. 누구에게든 배울 것이 있다. 부정적인 얘기조차도 듣고 있으면 나는 이런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나도 험악하게 생기신 야생미 넘치는 아저씨들이 속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곱게곱게 그렇게 지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낼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도 선택하지 않았을 테지. 그저 내 상황이 무조건 해야 했다. 쌍둥이도 있고, 시어머님에게 얹혀 사는데 일이 힘들다고 며칠하고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버티자. 그래서 더욱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 표정도 그렇게 하고 아저씨들에게 잔소리 담당을 해대었다. 나중에는 현장에 일하시는 모든 분들이 나를 잘 챙겨주었다. 


마지막에는 발전소 측 감독관님이 나에게 

"이 정도면 다른 데 가서 공사 하나 쭉 하실 수 있는 공정을 다 하신 거예요." 하셨다.


나는 계약직으로 존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일하면서 각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굳이 나의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나름 열심히 하였다. 어려워보니 어느새 철이 든 것인지, 인내심이 생긴 것인지.. 

모두 먹고살려고 열심히 사는 인생인데 할 수 있으면 서로 맞춰가며, 도와가며,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예전 얘기를 하니 이 더위에도 힘들게 일하셨던 그분들이 생각난다. 통제가 되진 않지만 열심히 하루를 살아내려고 새벽부터 나오신 일용직 아저씨들, 화가 많으신 현장소장님, 스마트하신 츤데레 발전소 감독관님, 아우디를 타고 멋지게 등장하신 사장님. 

점심을 든든히 먹었던 함바집의 넉넉함도.  


계약이 끝나고도 나에게 계속 본인 건설회사에서 일할 것을 권하셨던 사장님도 너무 감사하다. 그렇게 일이 많지는 않았는데 정이 쌓이기도 하고 내가 다른 곳에 또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을 알고 제안하신 건 아닌지 생각이 든다. 또 이사를 가게 되어 일은 못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나도 건설 관련 일을 하게 되었으니.. 사장님께 내 건자재를 팔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1년을 꽉 채웠던 건설현장. 그곳에서 나는 또 배웠다. 한고비 한고비 넘길수록 인생이 꽉꽉 차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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