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여자끼리 오면 저런 빵을 먹는다니까
아이들과 남은 시간 D-9년
나는 처음부터 깜파뉴를 먹고 싶었다. 민준이는 소시지빵, 서준이는 피자빵, 제이는 이 두 가지를 포함한 크림이나 초코 가득 든 빵. 우리 집 세 남자가 카페에 가거나 빵집에 갈 때 선택하는 빵들이다. 나는 이와는 정반대로 버터나, 우유조차 들어가지 않은 깜파뉴나 사워 도워, 바게트 등을 좋아한다.
그런데 4명이 저마다 좋아하는 음료와 빵을 고른다면 가격이 꽤 많이 나간다. 자연스레 음식 욕심이 제일 적은 내가 선택권을 포기한다. 아이들 먼저 고르게 하고 잘 먹는 제이가 고르게 한다. 제이가 초딩입맛이기 때문에 셋은 얼추 의견이 빠르게 맞아떨어진다.
아니 제이는 초등 저학년으로 식성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고학년이 되어 가는 쌍둥이들보다 더 초딩스럽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나름 내 영향이 있는 것인지 인스턴트 같은 것을 무작정 좋아하지도 않고, 소스도 적당히 묻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제이는 핫도그를 먹어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케첩을 뿌려대고 그 위에 엄청난 양의 설탕을 뿌려 주인아주머니의 신경을 거스르는 짓을 자주 한다.(주인들은 소스를 너무 많이 뿌리면 살짝 표정이 안 좋아진다.)
주말에 점심을 먹고 자주 가는 대형카페에 들렀다. 이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는 대형카페라서 빵의 종류가 다양하고 내가 좋아하는 심심한 맛의 빵이 하나 정도는 있기 때문이다.
무더위 덕분에 카페는 온갖 연령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2층까지 거의 만석인데 구석에 4자리 테이블이 하나 비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음료와 빵을 고르기 위해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하나 남은 깜파뉴. 하지만 식성 좋은 아이들의 의견부터 묻는다. 민준이는 역시나 소시지 빵, 서준이도 소시지가 올라가 있고 모차렐라 치즈가 들어간 빵을 골랐다. 둘이 메뉴가 겹치길래 둘 중 하나의 빵을 고르게 했다. 그리고 제이에게 빵을 고르게 하려고 빵을 둘러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여보, 이거 안 먹을 거지?”
나는 하나 남은 깜빠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절대.”
제이는 고개까지 반대방향으로 돌리며 얘기한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물었다.
“그럼 뭐 먹을 거야? 하나 골라봐.”
제이는 긴 식빵 같은 빵 위에 크림이 잔뜩 들어간 빵을 골랐다. 크림이 화려한 조형물처럼 칼집난 빵 사이사이에 날개를 펼치듯 위로 잔뜩 솟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느끼해진다. 하지만 셋이 좋다고 하기에 그대로 그 빵 하나를 담아왔다. 크기가 워낙 거대했기에 아이들이 고른 빵은 그대로 탈락시켰다. 방금 점심을 먹고 와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까지 하나 남은 깜빠뉴를 아쉽게 쳐다보다 계산대로 발길을 돌리는데 여자 두 명이 와서 그 하나 남은 깜빠뉴를 담아갔다. 아, 이제 진짜 먹을 수 없다. 역시 여자들은 저런 빵을 좋아하는 게 분명해. 나만 특이한 게 아니라고.
“여보, 저 빵 저분들이 가져갔네. 내가 먹고 싶은 빵이었는데 역시 여자들끼리 오면 저런 빵을 먹는다니까.”
나는 남자 셋이 갑자기 얄미워졌다.
제이에게 음식 픽업을 맡기고 계산을 하고 먼저 2층의 자리로 올라갔다. 우리 자리 바로 뒤 자리의 긴 소파에는 나이 많은 남자 한 분이 신발을 벗고 드러누워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거실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것과 똑같은 포즈로. 나는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갔던 시립도서관이 생각났다. 도서관은 동네 주민들로 가득했다. 누울 수 있는 긴 자리에는 약속이나 한 듯 아저씨들이 배를 천장으로 수평이 되게 하고 누워 있었다. 그분들로 인해 책을 읽을 자리가 없어진 우리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어야 했다. 시원한 에어컨과 편안한 자리는 사람을 초자연의 원시시대로 데려가는 듯하다.
제이가 빵을 들고 올라왔다. 그런데 쟁반 위에 일회용 비닐이 한 무더기다. 족발을 먹는 것도 아닌데 웬 비닐이지?
“민준아 서준아 한쪽씩 끼워.”
제이가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크림이 넘치는 빵을 손으로 뜯어먹기 위해 챙겨 온 것이다. 나름 깔끔하게 먹는다고 챙겨 온 모양인데 나는 밥맛, 아니 빵맛이 확 떨어졌다. 주린 배를 채우려고 카페에 온 것도 아닌데 저렇게 까지 야생적으로 빵을 뜯어먹어야 하나.
“인간이 포크를 발명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이프로 잘라서 포크로 찍어 먹는 게 훨씬 편할 텐데.”
깔끔쟁이 민준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제이와 서준이는 이미 한 입 베어 먹었다. 제이의 예상과 다르게 크림이 입에 다 묻었다.
“비닐은 빵을 담는 용도로 둔 것이지 그렇게 족발 먹듯 먹으라고 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민준이 서준이가 깔깔 웃는다. 듣고 보니 내 말이 맞는 것 같은지 제이가 입에 묻은 크림을 닦으며 비닐을 벗는다. 그리고 포크를 집어 들었다. 빵을 깔끔하게 찍어서 입에 넣는다. 서준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크림이 귀 위 머리카락에도 묻었다.
“우리 서준이는 귀에 입이라도 달렸나? 어떻게 먹었기에 크림이 귀 위 머리카락에 묻지? 참 신기하게도 먹는다”
또 깔깔거린다.
“여보는 인도 쪽에 사는 게 잘 맞는 거 같아. 원주민도 요즘은 포크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나?”
나는 크림빵을 먹기 좋게 자르며 계속 얘기한다. 남자 셋은 계속 웃는다. 크림 묻은 비닐은 이제 한쪽으로 치워두고 포크로 찍어 먹는다.
“비닐이 썩는데 500년이나 걸린다는데 우리가 죽은 뒤에도 크림 묻은 저 비닐은 500년은 더 살아있겠지. 그때쯤 세상은 인간은 없고 비닐만 남아있을 수도 있어.”
나는 잔소리를 한 번 더 하고 깜빠뉴를 생각한다.
그걸 골랐어야 했어.